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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Feb 23. 2018

우리 잘 살고 있구나

#05. 18년도 예산안

돈 관리는 내가 맡기로 했다.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있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 그대로 돈을 관리하는 역할일 뿐이니까.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연애할 때 데이트 통장을 사용하면서부터 돈 관리는 내 몫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잔고가 이거밖에 남지 않았는가’라는 당신의 질책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모든 돈을 하나의 통장에 모은 뒤, 필요에 따라 다시 이체했다. 당신의 월급이 한 달에 두 번, 나의 월급이 한 번 들어왔고, 각자의 용돈과 공과금을 비롯한 생활비, 각종 경조사비와 대출이자, 보험, 카드값은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써야 할 곳에 조금 더 썼으며, 여행도 몇 번 다녀왔지만, 다행히 돈이 필요할 때 통장 잔고가 모자라서 난처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1월부터 12월까지 꽉 채운 1년을 살았다. 돈이 드나드는 것을 빠짐없이 엑셀 시트에 옮겨 적었다. 모아놓고 보니 많이 사고 먹었지만, 많이 갚고 모으기도 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당신과 여러 추억을 남긴 것도 충분한데, 일 년간 혼자 살면 절대 모으지 못할 금액의 돈도 모았다. 결혼은 여러모로 좋은 것이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2018년_예산’을 짰다.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를 쓸지, 적금은 얼마를 넣을지, 펀드는? 경조사는? 여행은? 쇼핑은? 떠오르는 항목에 멋대로 금액을 매겼다. 당연히 예상 수입보다 지출이 월등히 높아 몇몇 항목들의 비용을 줄였다. 도서 구입과 운동을 위한 추가 예산을 주장했지만, 서로의 의견이 달라 약간 언성을 높였다. 뉴스에서 본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는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분기별 쇼핑 예산을 일부 삭감하여 추가 예산을 편성하는 것으로 극적인 타결을 이루었다. 말은 거창했지만, 꼭 애들 소꿉놀이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어서 웃음이 슬금 나왔다.

지인들과 모였을 때 돈 관리 얘기가 나와서, 당신이 쇼핑을 양보해준 덕에 18년 예산안이 극적으로 타결됐다고 자랑했다. 모두가 재미있게 산다며 부러워했다. 나는 그들의 수입이 부러웠지만, 그들은 우리의 소소한 재미를 부러워했다. 당신과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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