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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율 Oct 27. 2022

5화_짧고 드문 고요와 행복의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행복이라는 말만큼 시시하고 지루한 단어가 있을까.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나 도처에 널려있다.

그 단어는 너무나 말끔하게 옳아 보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남발된다. 음료수의 패키지에도, cf 속 만난 적 없는 연예인에게서도 우리는 행복을 당부 받는다.

하지만 행복은, 흔하지만 실제로는 드문 것,

닳고 닳았지만, 사실은 많이 마주치지 못해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행복의 순간을 고대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을 바라고 기대하기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지극한 행복은 뭘까, 행복의 순간은 대체 언제 찾아오는 걸까.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너무 많은 생각과 불필요한 걱정에 둘러싸인 지난날들을 보내고, 비로소 드문 고요를 마주했을 때 알게 되었다.

나에게 행복은 몰입에 있었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그 사실을 잊을 때, 그러니깐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을 때 지극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어떤 몰입의 순간이었고.
무언가에 집중하면 시간관념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순간은 희귀하다.

정신은 사실 에너지와 같은 것이어서 흩어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좋은 예술을 볼 때, 무언가를 깊이 탐구할 때, 달리기를 오래할 때, 많이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낼때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순간이 있었다.

악기를 불때 아주 가끔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악기를 부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었다. 보험료, 환율, 세계의 정세, 내일의 약속같은 것은 잊는다. 그런것을 생각하는 순간 반드시 음정을 틀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나, 내 자신의 문제, 혹은 사회의 문제 같은 것에 신경을 거두고, 악보에 쓰인 것들을 내 몸을 통과해서 악기로 재현하는 데만 집중하려고 한다. 물론 한 번도 그것이 제대로 된 적은 없다.


그런 시도들은 늘 실패로 끝나지만, 어쨌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왜냐면 내게, 그럴 실력도, 여유도 없기 때문에....(아, 나는 정말 플룻을 못 분다....)

그저 땀을 뻘쩔 흘리며 레슨을 받는다.

그래서 언제나 레슨을 하고 난 후의 나는 새 마음이 된다. 머리를 씻고 나온 것처럼 개운해서 무엇이든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40분간의 레슨 시간 동안 나는 숨을 어디서 쉴지를 생각해야 하고, 어디서 세게 쉴지, 어디서 천천히 쉴지를 생각한다. 호흡이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악보대로 움직여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하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어서, 세상의 여러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일상에서 매우 드문 것이다.


삶의 대부분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저 살아지기 때문에, 우리에겐 늘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람들에게는 잘 안되는 것을 지속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게는 악기인 것. 어떤 사람에게는 달리기일 수도, 명상일 수도, 헬스일 수도, 춤일 수도 있다.
내게는 플룻이 필요하다. 그저 살아지지 않는 순간이 필요하다.

말 대신 무언가를 재현해보려고 애쓰는 시간,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이런 것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짧게 무언가를 잊어본 경험으로, 다른 것들을 다시 채울 수 있는 몸이 되어 학원을 나온다.
바람결이 보드랍고, 마음이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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