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지 감수성' 교육이 절실한 시대에 접어들다
코로나 19의 발발로 처음 개학 연기가 공표된 뒤 얼마 후, 학교에는 일선 현장에서 시행해야 할 방역 관련 지침이 한가득 내려왔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과 더불어 여러 번 읽어도 한눈에 파악이 어려운 복잡한 수칙을 보며 과연 이것이 현장에서 실천 가능한 것일까 숨이 턱 막혔던 기억이 난다. 교실 내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시험 대형으로 자리를 벌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수칙은 개인의 공간과 시간을 상당수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교사들에게는 학생의 건강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학생들이 하교 후에는 교실에 남아 소독을 실시하는 추가 업무와 함께 수업 시에는 학생과 물리적 거리를 두어 발문 하되 절대로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된다는 부담이 따라붙었다.
4월이 되어 학생들은 아직 자택에 머물렀지만, 교사들은 새 학기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 출근을 정상 재개했다. 그 무렵 교내의 종소리가 코로나 안전수칙을 상기시키는 안내문으로 교체되었는데, 비록 녹음된 목소리가 매 시간마다 성실하게 방역수칙을 읊조리기는 했으나 나는 머지않아 이 단조롭고 지루한 장황함이 곧 익숙함으로 바뀌어 공허한 울림이 될 것이라고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에 무감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학생들에게 '종소리 챌린지'를 제시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공모하는 것이 어떨까 잠깐 생각했으나, 학생들이 순간 흥미를 느낄지언정 행간에 담긴 메시지를 오롯이 수용하고 실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접었다.
시각적으로는 복도와 건물 외부 곳곳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부탁하는 각종 화살표와 발바닥 모양이 차근차근 추가되기 시작했다. 분명 학교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 해야만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 있었고 거기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었다. 다만 나는 머지않아 학생들의 발길에 차이고 닳아 너덜너덜 벗겨져 나갈 발바닥들을 눈으로 좇으며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불편한 일상을 감내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5월이 되어 고3이 시범으로 먼저 등교 수업을 재개한 뒤, 이틀 간은 학교현장에서 방역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우려를 담은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성숙해야 할 고3'들 중 일부 학생들이 조기 하교 후 PC방에 들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강행했던 것 아니었나. 이윽고 중학교의 차례가 다가왔고, 정말 오랜만에 물고기 떼가 헤엄치는 듯한 역동적인 인파를 접한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았다. 서로 끌어안고 투닥거리며 만져대는 아이들을 향해 몇몇 선생님들은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연신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앞에서는 흩어지는 듯했으나 이내 선생님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다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전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후 교사들이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수업 도중 호흡 곤란으로 인해 쓰러진다는 기사들을 몇 차례 접하였으나, 이후 교육 관련 뉴스는 코로나 19로 인한 정책 변화나 여론조사 위주로 다뤄질 뿐 물리적인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한 문제점은 점차 부각되지 않게 되었다. 학생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명심하지 않는 것이 학교의 일상적인 민낯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부쩍 안정세로 접어들던 확진자 증가율에 불순한 기름을 끼얹은 이태원 클럽 사태로 인해 '미성년자 이전에 본을 보여야 할 어른부터 잘하세요'라는 질타가 더욱 유효했으니까.
그렇다고 교사로서 어떻게든 학생들의 코와 입에 마스크를 씌워야 하는 책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쉬운 담임 학급과 수업시간에는 그나마 마스크를 쓰라는 목소리를 높이기 수월하였지만, 쉬는 시간 복도에서 무작위로 접하는 부주의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적잖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상대적으로 확진자가 적은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일정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학교에 별다른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방심하고픈 철없는 군중심리에 무한한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지적하고 위협하려 해도 들은 척 만 척하는 불손함에 자존심이 상하거니와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가 히스테릭 꼰대로 낙인찍혀 학생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에 금이 갈까 봐 기껏해야 스윽 지나가며 유머를 곁들여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하루에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 이쯤 되면 교사들도 매 순간을 경계하는 동시에 유머를 장착하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타산지석 일벌백계를 할 수도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교무실에만 틀어박혀 있거나 눈을 질끈 감고 복도를 지나가고픈 심정이다.
학생들의 미성숙함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학생에게만 모든 잘못이 돌아가기 전에 일선 학교현장에 온전히 적용되기 힘든 가이드라인의 한계와 일개 교사인 나의 잘못 또한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학교 방역수칙 초기 가이드라인을 고스란히 적용하자면 교실에는 30명 안팎의 학생이 최대한 간격을 벌려 앉아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모서리 외곽에 앉은 학생들의 동선은 고려되지 않는다. (쓰레기통 바로 앞에 바싹 앉아야 하는 학생은 무슨 죄인가?) 제한된 쉬는 시간에는 제한된 화장실 개수를 이용하며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되 손은 30초 이상 씻어야 한다. 비말 전파의 우려 때문에 제자리에 앉아 불필요한 대화와 움직임을 삼가야 하지만 아직 친해질 계기가 없었던 서로의 마음은 가까이 유지해야 한다. 거의 숨쉬기와 공부하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을 하지 말라고 약 올리는 것처럼 들려도 할 말이 없는 연출이니, 이것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겠는가. 체육교과도 처음에는 전염병의 직격탄을 맞고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가뜩이나 활동에 구속받는 아이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자 점차 그 기준이 완화되고 있다. 영어교사인 나 역시 'listen and repeat'이 필수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마스크를 쓴 채 나를 따라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고, 서로의 접촉이 불가피한 모둠 활동을 안 해도 되는 편리함에 내심 안도하고 있지만 잠자는 아이는 내가 직접 흔들어서라도 깨워야 하는 얄팍한 이중성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나 역시 100% 정석대로 수칙을 준수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들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생겨났던 모든 일들이 마치 오랫동안 숨 참기 내기를 하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는 기분이 든다. 잠시나마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웅크리고 숨을 참을 수는 있었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삐를 놓은 숨을 너무 깊게 들이쉬고 말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는 말은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고르지 못한 숨을 헐떡이느라 현실을 파악하는 데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전염병의 위험성을 체감하고 예방과 확산 방지에 힘을 쏟는 '병인지 감수성'이라면, 우리 교육은 앞으로 이 병인지 감수성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를 두고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시대상이 요구하는 교사다운 교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