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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Aug 15. 2020

37년 만에 새로운 함의를 획득하다

Perspective - Ryuichi Sakamoto (1983)

비록 사태가 악화된 현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해야 하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많은 뮤지션들이 비대면 형식의 온라인 콘서트를 열어 코로나 19 전염병 사태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흐름에 동참했다. 이 시대의 뮤지션이자 사회 활동가인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坂本龍一) 또한 지난 4월 2일(유튜브 공개 일자는 5월 16일)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for the Isolated'라는 제목의 온라인 콘서트를 개최하여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을 달래준 바 있는데, 그는 콘서트 엔딩곡으로 그의 YMO(Yellow Magic Orchestra) 그룹 시절에 발표한 'Perspective'를 연주함으로써 곡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외연을 시기적 정황과 맞물려 확장시켜 보이는 특별한 울림을 선사하였다.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for the Isolated 콘서트 영상 링크

(본 영상이 외부 애플리케이션으로 인한 재생을 금지함에 따라 위 링크는 PC에서만 접근이 가능하며, 모바일에서는 유튜브에 해당 콘서트를 직접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링크 시작 지점은 Perspective 연주 전 류이치 사카모토의 클로징 멘트가 나오는 1:33:17부터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가벼운 팬층이라면 그를 'Merry Christmas Mr. Lawrence'나 'Rain'을 필두로 한 클래식 음악인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음악세계를 좀 더 파고들면 그는 클래식 음악만큼이나 전자음악 분야의 선구자이자 소리의 근원을 탐구하는 실험가임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데뷔작 'Thousand Knives (1978)'와 8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YMO 시절의 음악은 당시 꽤나 전위적인 전자음악이었고, 내가 아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만 보더라도 'Chasm (2004)'과 'Cendre (2007)',  'Out of Noise (2009)' 모두 앰비언트 사운드를 전개하거나 자연이나 실생활의 소리를 채집하여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울림을 극대화하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최근작 'async (2017)'의 경우 서라운드 채널의 음원 규격을 별도로 발표함으로써 그가 '청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운드'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암투병의 소회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신비롭게 묘사하는 형태로 풀어나가는 듯한 2017년작 작품, 'async' (출처: Bugs)


Perspective는 YMO의 'Service (1983)' 앨범에 전자음악 형태로 처음 수록되었으며, 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베스트 앨범인 '/04 (2004)'에서 보컬은 유지한 채 피아노 솔로잉으로 재편곡한 버전으로 다시 소개되었다. 산업화된 근현대 사회의 톱니바퀴 소모품으로 기능할 뿐인 인류의 단편을 노래했다는 이 곡은 단순 현재 시제로 마감된 단순한 문장을 기계적으로 나열함으로써 마음 한구석에서 저며오는 쓸쓸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훗날 프랑스 전자음악 듀오인 Daft Punk가 선보인 'Technologic (2005)'이 탈인격화가 완전히 끝난 기계의 시선에서 곡을 '제조'한 경우라면, YMO의 Perspective는 아마 기계화되어가는 문명의 초기 내지는 중기 단계에 해당하는 과정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Perspective의 오리지널 전자음악 버전이 실린 YMO(Yellow Magic Orchestra)의 1983년작 앨범, 'Service' (출처: Bugs)
Perspective의 피아노 편곡 버전이 실린 류이치 사카모토의 2004년작 베스트 앨범, '/04' (출처: Bugs)


그렇게 기계화되어가는 문명을 담담하게 노래했던 Perspective는 37년이 지나 코로나 19라는 전염병 창궐의 시기를 맞아 원작자의 부름을 받았고, 기존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Every day I open the window

매일 나는 창문을 엽니다

Every day I brush my teeth

매일 나는 이를 닦습니다

Every day I read the paper

매일 나는 신문을 봅니다

Every day I see your face

매일 나는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In the gleam of a brilliant twilight

찬란한 황혼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I see people torn apart from each other

나는 사람들이 서로 갈라서는 걸 봅니다

Maybe that's their way of life

아마 그것이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겠지요


Every day I ride in cars

매일 나는 차를 탑니다
Every day I watch TV

매일 나는 TV를 봅니다
Every day I write my diary

매일 나는 일기를 씁니다
Every day I go to sleep

매일 나는 잠자리에 듭니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에서 코로나 19의 불가결한 단상을 보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겠다. 폭넓게 보면 같은 비감이지만, 본디 의도가 기계화되어가는 문명을 관조하는 비감이었다면 현시점에는 (이미 기계화를 끝마친)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비감이라는 점에서 이 둘의 출발지점은 사뭇 다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그에 따른 새로운 함의를 획득한 Perspective는 그래서 특별하다. (본 곡은 음원뿐만 아니라 해당 콘서트 영상을 통해 감상하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클로징 멘트에 이은 곡의 아름다운 선율과 그에 오버랩되는 현장 스태프들의 결연한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해당 콘서트가 어떠한 의도로 기획된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영화음악계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부고가 전해졌을 때, 나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얼마 전 인두암 투병을 했던 그였기에 그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의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사랑을 담아 이 글을 바친다. 사카모토 교수님~ 앞으로도 건강하게 지내세요!


Perspective를 염두에 둔 듯한 교수님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손 씻기 캠페인 영상, 'Ryuichi Sakamoto: I wash my hands' (출처: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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