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정, 최백호, 심수봉, 김연자
트로트란?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대한민국의 음악장르 중 하나, 성인가요나 뽕짝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 트로트란 어릴 적(80년대 초반) 시장 골목 어귀에서 느껴지는 각종 냄새와 부산함,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느껴지는 조바심, 상인들과 아주머니들의 흥정하는 소리, 간혹 큰소리로 싸우는 등의 소란이 어우러진 종합 선물세트입니다. 당시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되살려보자면 시장 통로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습니다. 1~1.5m 정도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습니다. 건물 1층은 여러 상점이 있지만 상점 앞을 나서자마자 노점상들이 통로 양쪽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길바닥은 흙이 아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항상 물기가 있기 때문에 시장을 갔다 오면 신발이나 바지에 매번 구정물이 튀어 더러워졌고 손빨래하는 할머니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80년대 초엔 일반 가정집에 세탁기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이다 보니 각종 먼지와 쓰레기가 가득했고요, 노점에서 파는 여러 품목들(농산물, 생선 등의 수산물, 옷, 물통, 신발 등)의 냄새가 어우러져 할머니와 시장에 갔던 날은 나도 모르게 할머니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빠지지 않고 들렸던 것이 뽕짝입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꽤 컸던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들(아마 지금으로 치면 불법 복제 테이프- 1980년대 초반은 테이프나 LP로 불리는 레코드판이 대세였습니다. 시장에서는 주로 00 메들리로 불리는 빠른 템포 위주의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주로 팔았습니다. 간혹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를 팔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건 기억나지 않습니다)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랑 노래 같은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남자나 여자 가수들은 왜 이리 음을 꺾어서 부르는지요, 시끄럽기만 하고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어쩌다 TV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이 훨씬 듣기 좋았습니다(개인적인 음악 취향입니다).
음악이 뭔지, 노래가 무엇인지란 걸 어렴풋이 알게 된 이후에도 트로트(일명 뽕짝)를 향한 저의 비선호는 여전했습니다. 트로트 노래가 들리면 어렸을 적 번잡하고 지저분했던 시장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한결같음도 20대 중반이 넘어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이 되니 그제야 트로트가 좋아지는 쪽으로 바뀌더군요(아마도 나이가 들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니 세상을 향한 이해의 폭이 조금 넓어졌을까요?). 그 일등공신이 장윤정의 "어머나"입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토록 위화감 없이 노래와 찰떡궁합인 가수를 보는 호사를 누리다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은 뒤로는 제 안에서 트로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의 촌스러운 모습을 버리고 세련된 트로트로 변신해서 다시 저를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마치 시골 촌놈이 서울 와서 세련되고 멋진 남자로 변신했다는 게 가장 어울릴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트로트라는 음악에 대해 차츰 마음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가수는 심수봉입니다. 어릴 적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를 자주 들었습니다. 물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심수봉 노래는 그냥 좋았습니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좋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 때문인지 저는 간드러진 목소리, 코맹맹이 목소리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백만 송이 장미"입니다. 이 곡이 정말 좋아서 2004년 신입사원일 때 2년 동안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해 놓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던 곡입니다. 일반적인 트로트와는 다른 음악 구성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연상되는 가사를 들을 때면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걸 이겨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첫 직장에서의 2년이 생각납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잠시 한숨을 돌렸던 게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징검다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이후엔 최백호라는 가수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가수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1996년 대학 1학년 TV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온 영일만 친구라는 곡입니다. 19살, 대학 1학년이 그 노래를 듣고 무슨 감흥이 있었을까요?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노래가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대가의 곡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지요.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략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이 곡은 30대 중반이 넘어가니 가슴속에 담긴 곡입니다. 그리고 또 "부산에 가면"이라는 명곡이 2016년 또 제 맘을 흔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곡은 1000번도 넘게 들었을 겁니다. 꼭 해변이 보이는 카페나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주하며 들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무렵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5~60 아님 40대 중반의 나이의 남자가 옛 추억을 되새기며 쓸쓸히 읊조리는 독백 같습니다.
다음 곡은 김연자의 "아모르파티"입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네 인생은 오직 너만의 것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 자신감을 갖고 살아라는 메시지가 좋았습니다. 신나는 멜로디는 덤이고요, 그냥 기분이 별로다 싶을 때, 힘을 내고 싶을 때, 운동할 때 빠른 곡이 필요할 땐 이 곡을 들으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 노래는 구급출동 나가서 어이없던 환자와 보호자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인 저를 위해 후배가 들려줘서 알게 됐습니다. 신고자는 아들이고 병원에 가고 싶다는데 보호자인 부모가 그 이송을 거부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신고자가 본인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찾아가는 시간만 30분이 넘었고 그 뒤 우리와 대면해서는 다시 말을 바꾸는 엉망진창의 연속인 출동이었습니다. 신고자, 보호자를 진정시키고 제대로 협의하기까지, 그 후 현장에서 철수하기까지 2시간이 넘게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내 인생이지만 잠시 잊고 이 음악을 들으며 힘을 내봐" 마치 당시 내게 해주는 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싫어하는 가수로는 이미자, 나훈아, 남진, 현철 등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 제 마음은 그들에게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트로트에 대해 제 마음의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추석 맞으시느라 다들 힘드셨죠? 추천곡 중 아무거나 들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미지 출처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