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책은 제 친구였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아마도 몸 쓰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데다 남보다 못한다고 느껴지면 노력하기보다 그 분야의 일을 단념해 버리는 어릴 적 제 성향상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몸으로 노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땐 학교와 집,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수불석권(手不釋卷), 한자성어 그대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때였습니다(공부를 그리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공부와 책 보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더라고요). 오죽하면 밖에 나가서 놀지도 않고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저를 걱정해 부모님과 친지들이 제게는 책 읽지 말고 제발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그렇게 책을 못 보게 밀어내던 어른들이 왜 그리 싫었는지 모릅니다.
책을 읽으면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다 보면 그 안으로 푹 빠지게 됩니다. 그다음엔 머릿속에서 책 내용이 영화처럼 살아 움직였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이고 책 속의 주인공과 배경이 머릿속에서는 현실로 구현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서 일종의 4D 모니터가 작동했던 거죠. 온전히 나만의 영화가 상영되는 느낌,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책을 본 지 몇 분 만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험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책 읽기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향은 취직을 준비하는 20대 후반까지도 이어져 종종 도서관에 틀어박혀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심리학 서적(내 안에 있는 여신- 아마 이런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2000년 초반에 유행한 각종 재테크 책, 가장 좋아하는 소설 등을 봤습니다(사회과학 분야는 딱딱해서 잘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심리학개론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는 예전처럼 책을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내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주중에는 하루 15시간을 일하고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자거나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를 만나야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뒤부터는 예전과 달리 책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변한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통해 웹소설을 접하고 나서는 출퇴근하는 시간, 10분 남짓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200권/년 이상의 웹소설(판타지, 무협 등)을 봤습니다. 현실의 나는 아무 내세울 것 없는 보통의 사람이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은 달랐습니다. 멋진 데다 강하고 성격도 좋았습니다. 뭣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들이 종횡무진 그들의 세상을 휩쓰는 글을 보며 대리만족했습니다. 그렇게 웹소설과 친해지는 동안 전에 읽었던 소설은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양귀자, 공지영, 이문열, 조창인, 신경숙 등의 소설가들이 썼던 책을 봤던 예전의 모습과 웹소설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지금의 모습, 분명 똑같은 사람이지만 어쩜 이리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40대 중반이 지난 올해,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보게 됐습니다. 아들 둘과 서점에 들렀던 터라 제가 원하는 책을 차분히 읽을 만한 여유는 없었습니다. 보통 책을 고를 땐 제목을 먼저 보고 그 뒤 작가를 보는데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낯설지 않아 아래 지은이를 보니 정유정이라는 이름이 보였습니다. 아, 예전부터 들었던 작가 이름인데 소설이 영화화됐던 그 작가 아냐? 머릿속에서 그 작가에 대한 정보가 좌르륵 나열됐습니다. 평소에는 그 작가의 책을 그냥 지나쳤지만 그날은 왠지 그 책을 집어 들고 목차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목차를 보고 첫 페이지를 읽으려다 나도 모르게 맨 뒤편 작가의 말부터 펼쳐 들었습니다. 사이코패스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엥? 무슨 소설에 사이코패스가 나올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의 말만 읽어봤는데 책 내용이 궁금해지는 건 오랜만의 경험이었습니다. 아, 저 책 읽고 싶다, 살까 말까 계획에도 없던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무렵, 10분 남짓한 자유시간(두 아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책을 보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시간)이 끝나 아들 둘을 데리고 움직여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제목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종의 기원" 언젠간 읽고 말 거야 그리 생각했습니다.
보호복 종류(A > B > C > D)
그리 다짐했건만 책을 산 건 그로부터 서너 달이 지난 8월 초였습니다. 아이와 근처 도서관에 갔다 정유정 작가의 "28"이란 소설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이야, 첫 장부터 흡인력이 대단했습니다. 더구나 5년 동안 구급대원으로 활동한 제게는 그 책 내용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그 책을 보는 동안 2015년 메르스 때 Level D 보호복을 입고 아파트에 출동 나갔다 주민들이 창문에서 나와 동료를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내려다보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수의사와 소방관, 썰매개, 사이코패스, 의사, 경찰 등 여러 인물과 사건을 씨실과 날실처럼 조합해 이런 얘기를 만들 수 있지 감탄하며 그 소설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책을 보는 동안 예전부터 숨겨놓았던 빛바랜 소망 하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얘기의 뼈대를 만들고 여러 등장인물이 되어 장면 하나하나를 만들어가는 작가님의 모습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지금의 나는 (작가가 되기엔)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꼭 책을 쓰리라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8"을 다 읽자마자 정유정 작가님의 책 3권을 한 번에 샀습니다. "7년의 밤",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 책을 산 지 2주 만에 2권을 읽고 지금은 완전한 행복을 보고 있습니다. 근 20년 만에 다시 웹소설이 아닌 소설(웹소설이 일반 소설보다 수준이 떨어지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 마시길)로 돌아오게 만들어준 정유정 작가님! 책 잘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책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