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막내 시절 힘이 됐던 노래
1998년 2월 중순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12월 말에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부평의 경찰종합학교에서 4~6주 정도 후반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육은 배에 관한 전반적인 것-함상 통신, 배의 구조나 원리, 1 nautical mile의 길이, 그리고 마지막은 요리였습니다. 왜 요리를 배우냐고요? 그게 저도 큰 의문이었습니다. 교양 강좌인가 생각했지만 이어진 지도교관의 한 마디에 동기들 모두 실망하는 눈빛이 가득했습니다.
"너흰 모두 배에서 취사병 역할을 한다. 배에서 밥 짓는 사람이 셋이면 너희 밑으로 세명의 후임이 올 때까지 밥을 하는 거다, 해양경찰은 따로 취사병이 없으니까 그걸 막내인 너희가 하는 거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밥을 한다. 너희 중에 아주 운 좋은 녀석들 몇몇은 밥을 안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열외는 거의 없을 거다. 그러니 1주 동안 요리 잘 배워가라." 교관님의 말씀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아니, 라면밖엔 안 끓여본 제가 무슨 취사병이냐고요 따지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속으로 삼켜야 했습니다. 여긴 군대니까요. 나와 같은 심정의 동기들 역시 그런 마음일테니까요.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각자의 해양경찰서로 발령받은 게 2월 중순 경(제대한 지 20년이 넘어서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주해양경찰서에서 5명의 동기들이 배 3척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만 혼자 303함(배 만재수량으로 분류, 303함은 300톤급이고 1501함은 1500톤급, 당시 해군의 가장 큰 배이자 최신함인 광개토대왕함이 3000톤급이었음, 해경은 같은 급인 3001함이 94년에 취역)이고 다른 동기들은 둘씩 502함과 1501함으로 배치받았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혼자 동떨어진 것도 서운한데 그곳에 있는 선임들 역시 어마어마했습니다. 오죽하면 바다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곳의 일과는 맞는 일로 시작해 맞는 일로 끝났습니다. 아침 먹고 맞고 점심 먹고 맞고 저녁 먹고 맞고 자다 깨서 불려 가 맞고 하루에 네 번씩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몸이 편한 곳이라 그런지 쓸모없는 똥군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양말을 신을 때 서서 신어야 했습니다. 뱃멀미를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매 끼니 밥을 세 그릇씩 먹어야 했습니다. 대신 반찬을 먹을 순 없었습니다. 그리고 멀미를 하면 선임들에게 맞게 되는데 그게 선임별로 2배씩 늘어난 수를 맞아야 했습니다. 뱃멀미를 했을 경우 몇 대를 맞아야 하나 계산해 봤더니 약 500대였습니다. 저 원래 차멀미 심하게 했었는데요 맞는 게 무서워 멀미를 참다 보니 나중엔 심한 파도에도 멀미를 하지 않는 뱃놈 체질로 바뀌었습니다.
(글 쓰고 있는데 화재출동 벨이 울려 5분 정도 쉬었다 다시 씁니다. 다행히 제가 담당하는 차량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화재 규모와 종류에 따라 나가는 차가 다릅니다)
303함에서는 취사병이 3명이었습니다. 그 위로 8명 정도의 전투경찰 선임이 있었고요, 20명 정도의 해양경찰관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05:00 기상 → 아침 식사 준비 → 07:20 아침 배식 → 08:15 아침 배식 후 취사병 식사 → 09:00 아침 설거지 후 점심 준비 시작 → 11:45 점심 배식 → 12:30 점심 배식 후 식사 → 13:20 점심 설거지 후 15:30까지 휴식 → 15:30 저녁 준비 → 17:45 저녁 배식 → 18:30 저녁 배식 후 식사 → 19:20 저녁 설거지 및 취사실 청소 → 20:00 개인 샤워 및 빨래 → 21:00 야간 점호 → 21:30 점호 후 야식 → 22:00 야식 후 설거지 및 취침. 사람은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니 휴일도 없었습니다.
처음 배우는 칼질을 하니 신경을 썼어도 손가락이 베이기 일쑤였습니다. 가르쳐준 대로 칼질을 하지 않는다며 김치를 자르다가 뺨을 맞는 일은 다반사였고 조인트를 까여 정강이 역시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맞는 자세도 독특했습니다. 늘 부식창고에 들어가(배는 모든 격실이 물을 막는 수밀구조여서 안의 소리가 바깥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출동 시에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 덕분에 격실 문을 닫으면 안의 상황을 밖에선 알 수 없습니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팔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상태로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선임의 주먹과 발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으며 맞아야 했습니다. 가슴 쪽을 계속해서 맞으니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참다 참다 그 얘기를 하니 이젠 때리는 부위가 바뀌었습니다. 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배만 주구장창 맞다 보니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나니 살이 저절로 빠지고 몸도 허약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4월의 어느 날인가 맞는 도중 졸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흔히들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갑자기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하더니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나를 때리던 선임은 개 XX가 존 X 빠져서 쓰러진다며 바닥에 널부러진 저를 무자비하게 밟아댔습니다. 이렇게 맞다가는 진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꾀를 부렸습니다. 일부러 침을 삼키지 않고 머금었다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몸을 떨며 거품을 물었습니다. 그제야 옆에 있던 다른 선임이 이러다 애 죽는다며 말리더군요. 그 뒤로는 맞는 횟수와 강도가 줄어들었지만 구타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땐 그렇게 지내야 했습니다. 참는 게 일이었지요. 글을 쓰는 지금도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왜들 그리 때리고 맞아야 했는지...
낯선 환경-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겨울 바다-에, 무자비한 선임들의 구타와 욕설은 금상첨화였습니다. 오죽하면 거친 파도로 인해 생긴 멀미를 참는 일이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힘들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오늘 하루가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가끔 배 후미에서 노을 진 불그스름한 하늘을 바라볼 때, 바다에 빠지면 저녁에 맞지는 않을 텐데라는 유혹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습니다. 바다에 뛰어들면 그 뒤 무슨 일이 벌어질 걸 알면서도 몇 시간 뒤 맞는 게 싫어 뛰어내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의 첫사랑이 생각나고 가족들과 지내던 시간이 천국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여긴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괴물들과 아주 가끔 사람으로 변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같았습니다. 그때 내게 힘이 되어준 노래가 있었습니다. 바로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입니다.
한참 밥을 하며 칼질과 요리에 익숙해지려 노력할 무렵, 제대를 세 달 앞둔 넘버 원 선임이 주말 외박을 다녀온 후 심심했는지 취사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막내인 저를 불렀습니다.
넘버 원 : 막내야, 내가 나가서 어떤 영화를 봤는지 아냐?
나 : 알아보겠습니다(모르겠습니다는 말을 쓰면 맞았습니다. 대신 이 말을 써야 했습니다)
넘버 원 : 타이타닉이라고 들어봤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랑 케이트 윈슬렛이 나온다(맛있게 담배를 피우며) 그 영화가 밖에서 인기 만점이다, 크~~ 너 애인 있어, 없어? 여자랑 이 포즈 해봤냐?(다들 아시죠? 배 선수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랑 케이트 윈슬렛이 안는 모습)
나 : (놀리려는 선임의 의도를 알기에 일부러 당해줌) 애인 없습니다, 아직 못 봤습니다.
넘버 원 :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거기 주제가 끝내준다. 나중에 한 번 들어봐라
나 : 네, 알겠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노래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인근 2~30km 해상을 떠 있는 배에 타고 있으니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핸드폰도 소지할 수 없었지만 그 역시 당연히 불통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요? 출동을 나가면 여러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오는데 그 꾸러미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타이타닉 영화 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취사병들은 배식이 끝나면 설거지를 하고 남는 시간에 식당에 설치된 비디오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넘버원 선임이 말했던 그 유명한 셀린 디옹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노래를 듣는 데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감미로운 가수의 목소리 그리고 늘 구타에 시달리던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멜로디가 좋았습니다. 마치 답답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 같았습니다. 선임들에게 꾸지람을 들을 각오를 하고 볼륨을 키웠습니다(그땐 내맘대로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걸 다 허락받아야 했습니다). 스무번도 넘게 노래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후렴 셀린 디옹의 고음 부분은 마치 답답한 내 마음을 대신해 소리 질러 부르는 것 같아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노래를 듣는 그 땐 바깥에선 거친 파도가 몰아쳐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춥고 힘들며 볼품없고 구박받는 막내지만 나중의 나는 달라질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눌러만 놓았던 감정-억울함, 서운함, 화남 등-을 서서히 날려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공기가 가득 찬 풍선은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지만 98년 3월의 저는 셀린 디옹의 노래를 들으며 맘속에 가득 찬 공기를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겠지요. 그 땐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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