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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Nov 21. 2022

첫눈 내린 날, 따뜻한 크랜베리 키셀 한 잔.

리투아니아 과일 음료 레시피


빌니우스에 첫눈이 내렸다.


전 날 저녁 신호등 가장자리부터 소심하게 덮기 시작하더니 음날 정오를 넘겨서도 실하게 려서 꽤 도톰 쌓였다. 발코니 난간에 고정시켜놓은 바람개비 두 개는 가을 비바람을 용케도 이겨내고 살아남아 이따금 걸려드는 눈들을 털어내며 힘차게 돈다. 언젠가 아이들이 낑낑대며 끌고  꽤 건강한 침엽들이 매달린 나뭇가지에도 쌓인다. 구시가의 헐벗은 조각들에도 울퉁불퉁한 주홍색 기왓장 위에도 촘촘히 쌓인다. 신호 기다리는 차량들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도 이때다 하고 나부며 도로를 덮는다. 귀성 차량이 빼곡히 들어선 명절 국도에 출몰하던 구수한 오징어 장수처럼 지런하다. 일단 내리기 시작하면 어디파고다. 첫눈은 겨울에 대한 공증이다.



11월의  첫눈치고는 꽤 많은 눈이 왔다.


아무리 늦게 도착해도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가장 일찍 도착한 사람이 된다. 눈은 자기제나 일등이란 걸 아니깐 두르지도 늑장 부리지도 않는다. 함박눈이든 싸라기눈이든 그것이 흔적조차 지 않고 사라지더라도 단지 처음 기다리는 우직한 사람들로 인 영원히 그 해의 첫눈으로 기록된.



투아니아 사람들은 눈이 내린 날 축하 인사를 건넨다. Su pirmuoju sniegu! 남은 겨울 동안 뒤따라 내릴 수많은 눈들 듬직한 대표, 첫눈 다.



길을 걷다가 성 니콜라스 성당에 들렀다.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수호 성인이다. 아직 아무도 발들이지 않은 성당 정원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첫눈 보낸 신호에  속에서 가장 두꺼운 겉옷과 젖지 않는 장갑과 모자를 꺼다.  냉장고에 있던 크랜베리 한 봉지 꺼다.  여가는 눈을 보며  따끈한 크랜베리 키셀 한 잔이 생각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생각만로도 온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겨울의 이 있다. 인사동 찻집에서 마시던 생강차, 매운 비빔냉면에 얼얼해진 혀를 토닥 뜨겁고 진한 육수, 편의점 온장고를 열고 꺼내는 뜨끈 유리병 속의 콩 음료, 자판기에서 또르륵 하고 굴러 나오던 캔커피,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기다리는 동안 마시던 어묵 국물 같은 것들다. 모두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 추억일 테고 어디에도 없는 한국의 겨울 정취들이다.



리투아니아에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난방 시즌만 계산하면 겨울이 장장 6개월간 지속되니 늘 추운 느낌이지만 이곳에도 역시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한 12월과 1월에 겨울의 인상이 절정에 이른다. 연유와 카다멈을 넣어서 끓이곤 하는 밀크티, 끈한 보르시취, 뜨거운 와인, 분명 차갑지만 들이키는 순간 목구멍이 뜨겁게 타오르는 보드카 한 샷, 그리고 설탕과 끓여내는 시큼 달큼한 과일 음료들이  주인공들이다.



잠길 정도의 물을 넣고 끓여준다,


 늦가을이 제철인 크랜베리 단연 겨울 음료의 단골 주인공이다. 물의 양에 따라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소량의 물과 설탕만 넣고 끓여 블렌더로 갈면 치즈 케이크크레페, 아이스크림 위에 부을 수 있는 과일 퓌레가 고 물을 조금 넉넉하게 부어서 건더기와 함께 걸쭉하게 끓이면 잼과 시럽의 중간쯤인 콩포트가 된다. 건더기를 전부 갈아서 물을 추가하면 스무디 형태의 진한 주스, 물을 조금 더 넣고 전분을 넣으면 묽은 젤리 형태의 키셀이 된다. 리투아니아에서  키셀리우스 Kisielius 러시아에서는 키셀 Кисель이라고 부르는데 '시다'를 뜻하는 러시아어에서 유래했다. 이 근방의 동유럽 국가들에서 널리 마시는데 나라별 명칭들은 거의 유사하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톡톡 소리를 내며 크랜베리가 터진다.


크랜베리가 끓어 터질 때 나는 소리와 모양새는 프랑크 소시지를 튀길 때 갈라지는 소리와 굉장히 비슷해서 항상 재밌다. 크랜베리가 말랑해지면 포테이토 매셔로 최대한 잘 으깨고 블렌더로 휘리릭 한 번 갈아준다. 그때 물을 추가하고 설탕으로 간을 맞춘 후 전분물을 넣어서 농도를 조절하거나 전분물 없이 그냥 주스로 마시면 된다.



냉동 크랜베리와 말린 크랜베리는 사시사철 구할 수 있지만 선한 크랜베리는 10월 즈음에야 마트에 등장한다. 붉고 신선한 크랜베리는 난히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린다. 이즈음에 나오는 크랜베리 잘 냉동해뒀다가 크리스마스 때 한 솥 끓여 온 가족이 함께 마시거나 고기 요리에 곁들다.



크랜베리를 진하게 끓여서 냉장보관하며 때마다 희석시켜 마신다.



크리스마스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오후 4시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 와중에 곳곳에 자리 잡은 옥외 광고들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며 검게 칠해진 도화지 위를 스크래치 하듯 거리를 밝힌다. '뭔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는 쇼핑몰의 크리스마스 마케팅이 눈에 어온다. 여기저기에 이때다 하고 나타나는 광고들은 물론 지갑을 열게 하려는 심산이겠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서 한 해를 정리하는 축제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는게 사실이다.



 비로소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때, 하지 않은 것과 해야 할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믿지만 일상의 소박한 기다림의 순간에 마저 등을 돌지 않다. 아이들이 잠든 후 따끈한 차 한잔을 끓여 좋아하는 영화나 책 몇 페이지를 마주할 시간. 선물 받은 어드벤토 달력을 뜯기 시작할 12월 1일, 낮이 밤보다 비로소 길어지는 날, 짧게 자른 앞머리가 눈썹을 극적으로 뒤덮는 순간, 커피 드립지에 부운 물이 다 줄어들고 밥솥의 취사 버튼이 보온 버튼으로 전환되는 순간, 아이들의 콧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 떠올리기만 해도 분이 좋다. 


첫눈이 가져다준 따뜻한 크랜베리 키셀 한 잔 앞에 놓 크리스마상상한다. 크리스마스 땐 크랜베리 키셀이 배로 맛있를 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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