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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Oct 03. 2022

신경질은 병조림하자는 리투아니아 사람들

리투아니아식 오이 피클 제조기


배가 고플 때 물만밥에 김치만 쫙 찢어 먹고 싶을 때가 있고 고구마에 동치미 국물이 생각나는 것처럼 서양의 기름진 육고기들과 퍽퍽한 삶은 감자가 힘겹게 지나가는 식도를 확 뚫어주는 음식 중 하나가 오이피클이다.


러시아의 SF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초반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평범한 식당 음식이 그에게 차려졌다. 시큼한 양배추 수프, 소골 완두콩 스튜, 오이 피클 (나는 군침을 삼켰다), 그리고 영원히 질리지 않는 달콤한 파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해, 나는 마음먹고는 창턱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영원히 질리지 않는 것은 달콤한 파이이고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은 완두콩 스튜일 것인데 군침의 가장 강력한 진원지는 다름 아닌 오이 피클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커틀렛 네 개=커다란 오이피클 네 개'라는 공식까지 역설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들 속에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음식 묘사에 있어서는 지독히 현실적이다. 게다가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60년대 러시아의 부엌과 21세기 리투아니아의 부엌 풍경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순간 부엌에서 익어가고 있는 내 오이피클로 시선이 갔다


오이 껍질을 잘 벗겨낸다.


겨울이 긴 리투아니아에서 피클을 만드는 것은 일상이다. 여름이 되면 부엌 수납장에 꾸역꾸역 쌓여가던 빈 유리병들은 신선한 채소들로 속속들이 채워진다. 때로는 몇 시간 후, 아니면 그 해 겨울 혹은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피클은 차례대로 열린다. 물컹하게 축 늘어진 채소들이 풍기는 코를 찌르는 신맛은 봉인된 것은 단지 채소뿐만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어떤 여름의 기억, 누군가의 새로운 피클 레시피, 그리고 피클을 맛볼 순간에 대한 기다림이 모두 어우러져 풍성한 여름의 채소들은 숙성된다.



원하는 모양으로 잘 썰어준다


여름이 되면 여기저기서 오이를 준다. 많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러시아의 다챠에 해당되는 소디바 sodyba라고 불리는 작은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텃밭과 정원이 딸린 여름 별장에서 자신들이 먹을 채소와 과일들을 수확한다. 판매가 아닌 순전히 자급자족을 목표로 농사를 짓지만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의 농사를 짓는 것은 또 불가능하니 결과적으로 자신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의 몇 배나 되는 양을 재배하게 된다.


 그렇게 생겨난 많은 야채들을 절이고 말리고 과일들은 착즙하고 잼을 만들고 그래도 남는 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또 나눈다. 농사는 정말 헌신적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곳 귀한 여름 태양 아래 촉촉한 흙을 밟은 채로 그들이 만끽했을 수확의 기쁨과 보람을 나는 그렇게 아무런 수고 없이 전달받는다.



소금을 뿌리고 몇 시간 놔둔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미성년>에 보면 스웨덴 가정교사에 대한 짧은 묘사가 있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가정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보통 슬프고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대목은 오히려 유쾌하다. 당시 뻬쩨르에서 함께 부대끼는 핀란드인이나 영국인, 독일인 등의 이민자들에게 늘 서늘하게 삐죽거리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스웨덴 여교사에게도 어김없이 그런 자세를 취하는데 가정교사에 대한 묘사가 대충 이렇다.


적당히 쓰고 그럭저럭 가르칠 줄 알지만 특히나 오이를 기가 막히게 잘 절이는 스웨덴 여교사


 '그나 오이를 맛있게 잘 절이니 관두게 하기도 애매한 가정교사'라니 작가의 관찰력과 냉소에 웃음이 난다. 그러니 직접 피클을 만들 때에도 누군가의 맛있는 피클을 맛볼 때에도 구절이 생각나면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등살이 따가워다. 오이를 잘 절이는 것은 둘째치고 적당히 쓰고 가르칠 줄도 모르는 것 같아 왠지 더 찔린다.  대작가가 실제로 맛있어한 오이 피클은 과연 어떤 맛이었을까.



식초,설탕,마늘,고추가루,기름과 섞어서 반나절 정도 놔둔다.


학창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보통 라면을 끓여 먹는다. 그때 딸려 나오던 김치들이 늘 먹던 엄마 김치와 하나같이 다 달랐던 것처럼 리투아니아에서는 오이 피클이 그런 존재다. 비트나 양배추 절임은 대동소이하지만 오이 절임의 스펙트럼은 무궁하다.


김치를 따로 담가먹지 않는 나에겐 양배추와 오이 그리고 비트가 기본이 되는 리투아니아의 채소 절임들은 훌륭한 대체 식품이다. 한국에서 김치로 찌개나 국을 끓이듯이 절인 양배추와 오이들은 훌륭한 리투아니아식 수프의 재료가 된다. 특히 절인 양배추에 고춧가루를 한 술 넣으면 김칫국과 몹시 흡사해진다.



모든 오이가 잘 잠기도록 꾹꾹 눌러서 병에 옮겨 담는다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 것이 싫으면 파프리카 가루나 강황 가루를 넣으면 예쁜 색이 나온다. 식초물을 끓여서 부을 것도 없이 이렇게 섞기만 하면 되니 정말 편하다. 그리고 보관해 놨던 빈 유리병들에 차곡차곡 넣어준다. 리투아니아에 유리병에 담아서 파는 제품들이 원체 많다 보니 쓰고 난 유리병들은 진열하기 좋은 형태 위주로 남겨놓게 된다. 이렇게 누가 재료를 줘서 피클을 만들면 한 병 정도는 예쁜 병에 담아 돌려준다.



피클에 쓰이는 허브 다발



만약에 식초나 설탕을 사용하는 것이 번거롭거나 절여서 바로 먹고 싶다면 그냥 허브와 소금만 쓰는 방법도 있다. 한국의 김치로 치면 겉절이 같은 느낌으로 반나절만 숙성시켜도 된다. 오이 절임에 쓰는 허브는 보통 재래시장에 판다. 블랙 커런트, 체리, 겨자 잎사귀와 딜 등이 그 주인공인데 시장의 야채 코너에 꽃도 야채도 아닌 행색에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듯 자유분방하게 헝클러 져 있다. 시어머니는 빌니우스에 오실 때마다 절인 야채 한 병씩을 가져다주신다. 귀중한 피클 단지를 깜빡하셨던 어느 날. 오이를 반드시 절여야 한다며 다 함께 산책하는 도중에 시장을 향하셨다. 그리고 오이와 허브를 사셔서 하루 종일 가방에 들고 다니시는 애착을 보이셨다.



한 여름의 꽃다발



이렇게 가져온 풀떼기들은 사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예쁘다. 그냥 놔둬도 여름 향기 가득한 정물화가 되고 풍경화가 된다. 저 풀잎들을 자신의 텃밭에서 하나하나 꺾어서 하얀 천조각을 찢어 저렇게 매듭지어 시장으로 가져오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정겹다. 1 유로면 살 수 있는 저런 잎사귀 다발은 사실 전부 약초이다. 특히 블랙 커런트 잎이 그렇다. 보드카에 우려서 진액으로 쓰거나 말려서 차로 마신다. 지금까지 정말 수십 종류의 허브차를 마셔 본 것 같다. 사람들은 이름을 기억하기도 힘든 이런저런 차들을 꺼내와서 효능을 설명하며 대접한다. 풀떼기를 끓인 것에 불과한 모양새와 맛이지만 손발이 따뜻해진다거나 온 몸이 나른해지는 등의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식물들이라 자주 먹어서도 아무나 먹어서도 안된다.



왼쪽부터 커런트, 딜, 겨자, 체리 잎사귀


지난여름에 내게로 온 이들의 일부는 지금은 마른 잎사귀가 되어 부엌 수납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한여름 리투아니아의 재래시장을 지날 때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뒤돌아보게 된다면 이들 덕분이다.



물 1리터당 소금 한숟갈


오이 절임 전용으로 탈바꿈한 냄비 속에서 차갑게 익어가고 있는 오이들. 이의 앞뒤를 자르고 향신료와 마늘을 넣고 소금을 푼 물을 부어준다. 우리나라에서 누름돌을 쓰듯이 무거운 걸로 눌러 두면 더 좋다. 풀들에 둘러싸여 소금물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고 힘이 쫙 빠진 오이는 그 특유의 냄새로 여름날의 집안 곳곳을 메운다. 딜 향기가 가득 배어있는 이 냄새는 늘 16년 전 리투아니아에서의 첫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아삭한 식감에 짭쪼롬한 맛



이 오이들은 식초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산미가 덜하며 맛이 좀 덜 들어 싱그럽다. 오이를 건져낸 물은 버리지 않고 다시 새로운 오이를 넣어서 한 번 정도는 더 사용할 수 있다. 건져낸 오이는 최대한 빨리 먹는 게 좋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거나 선풍기를 트는 습관은 없지만 한 입 베어 물면 감춰져 있던 수분을 뿜어내는 이런 음식들을 먹으며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더위를 이겨 낸다고 생각한다.


방 한가운데서 회전하고 있는 선풍기를 발끝으로 슬쩍 밀어내고 허리를 구부려 들고 온 밥상을 내려놓던 지금 내 나이의 젊은 시절의 엄마를 상상해 본다. 저녁 내내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요리하다 밥상 한가운데 시원한 오이냉국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느꼈을 쾌감과 무거운 오이를 배낭에 넣고 하루 종일 걸었어도 불평 한 마디 없던 오이 절임에 대한 시어머니의 집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이 사이사이로 풀잎과 마늘을  집어 넣는다.


지금부터의 절임 방식은 오이를 장기간 보존하고자 할 때 주로 쓰이는 방법으로 오이를 유리병에 세워서 눌러 담고 허브를 넣고 식초물이 끓어오르자마자 부어서 보관하는 피클이다. 이렇게 고작 세 병을 담는 것은 아주 귀여울 정도의 소규모 제작이다. 텃밭이 있는 사람들은 날을 잡고 오이를 절인다. 커다란 수건이 깔린 식탁 위에 소독한 수십 병의 유리병들을 놓고 그 해의 여름을 걸어 잠그는 작업. 한국의 겨울을 대비하는 김장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끓인 식초물을 유리병의 끝까지 채워 붓는다.


1리터의 물을 기준으로 식초 100밀리. 소금 2스푼 설탕 1 스푼을 잘 녹여서 끓인 후 유리병에 붓고 꽉 닫으면 된다. 사실 이 방법도 알고 보면 간단하지만 오래 두고 먹는 피클인 만큼 맛이 잘 들지에 대한 염려가 더해져서 인지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느낌이 든다.



뚜껑을 닫은후에 공기 접촉을 최소화 하기 위해 얼마간은 거꾸로 세워둔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오이 절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어떤 친구는 할머니가 하얀 곰팡이가 표면에 잔뜩 떠있는 오래된 오이 피클 단지를 열어서는 씻어서 강제로 맛을 보게 한 이후로 오이 피클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다. 물컹한 묵은 김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팍 삭은 오이피클에도 호불호가 갈린다.



얼마 후에 변한 색깔


리투아니아에 온 지 일 년이 지났을까. 내 인생에 깊숙이 들어올 오이 피클을 짐작이나 했는지 친척 언니가 소포로 보내준 까뮈의 <행복한 죽음>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읽자마자 너무나 공감하여 지금까지도 시장에 갈 때마다 거의 매번 이 대목을 떠올린다.


'밤의 저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냄새가 그에게도 올라왔다. 새큼하면서 톡 쏘는 그 냄새를 맡게 되자 마음속에 잠겨 있던 모든 고통의 힘이 다시 깨어났다. 혓바닥에, 콧속에, 눈 위에 그 냄새가 느껴졌다. 그것은 저 멀리에 있다가 다음엔 길모퉁이에, 그리고 이제는 어두워진 하늘과 미끈거리고 질척대는 포도 사이에 마치 프라하의 밤을 지키는 불길한 마법사처럼 버티고 있었다. 메르소는 그것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냄새는 점점 더 실재적인 것이 되면서 그를 송두리째 사로잡았고 메르소의 눈은 눈물이 나도록 따끔거렸다. 그는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길모퉁이에 이르러서야 그는 냄새의 정체를 알아냈다. 한 노파가 식초에 절인 오이를 팔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메르소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지나던 행인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오이를 한 개 샀다. 노파는 오이를 못쓰는 종이에 둘둘 말아 싸주었다. 그는 몇 걸음 걸어오다가 메르소 앞에서 종이 꾸러미를 열더니 오이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러자 물어뜯은 오이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아까보다도 더 진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오이 절임의 가학적인 향기에 이만큼의 문장을 할애하다니 딜과 식초 그리고 오이의 화학작용에 프라하 거리를 걷던 카뮈도 압도되었던 것은 아닐까. 할머니 때문에 오이 트라우마가 생긴 친구 깊게 공감할 구절이다. 게다가 물어뜯은 오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는 대목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리얼하다. 오이에 부어진 식초 냄새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은 단연 딜과 커런트 잎사귀이다. 그저 시장에서 여름의 풍성한 꽃다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미지의 오이절임은 침 고임을 유발한다.



시간을 겪고 나면 오이도 달라진다.


리투아니아에는 '신경질일랑 병조림해라 Nervus į konservus'라는 재밌는 표현이 있다. 남성 명사 두 개가 동시에 어미변화를 하니 라임도 척척 들어맞는다. 즉슨 괜히 짜증내고 신경질 내지 말고 마음 단속을 잘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짜증을 병조림해서 볕이 들지 않는 창고 한 구석에 두고두고 처박아놓을 궁리를 하다니 그러고 보면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참 속 편한 평화주의자들이다. 은은한 굴욕감과 상큼한 수치심을 유발하는 이런 조곤조곤한 리투아니아의 표현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



맛이 가득 든 피클들에 참기름을 섞어 오이지 무침도 만든다.


화가 치밀어 오를 것 같은 순간 혹은 누군가의 짜증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고 싶은 순간 이 표현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이 리투아니아식 충고를 듣는 순간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단단히 휘감고 있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이 변할 여지가 다분한 일시적인 착란에 불과하다고 느껴지며 조금은 머쓱해진다. 펄쩍펄쩍 뛰는 미성숙한 감정들을 작은 단지에 꼭꼭 눌러 담아서 잠잠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 영원할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뭘 그렇게까지 화를 냈지 싶어 민망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의외로 짧다. 그러니 매 순간 채소 절임 할 때마다 각한다. 병조림해야 하는 것은 채소뿐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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