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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Oct 19. 2022

리투아니아에서 14년째 청어 절임 입문 중

매일매일 초심자 모드로 리셋하기

아리 애스터의 <미드 소마>를 보면 스웨덴의 하지 축제에 참여 중인 대니청어 절임을 권유받는 장면 나온다. 스웨덴 사람들은 행운의 상징이라는 절인 청어를 꼬리부터 머리까지 통째로 미국인 대니의 입속으로 집어넣지만 대니는 결국 씹지 못하고 뱉는다.


비슷한 일이 나에게도 있었다. 14년 전, 빌니우스에서 일하기로 한 프랜차이즈 식당의 실습 때문에 암스테르담에 머물 때였다. 같이 일했던 태국인 스탭이 마지막 날 이건 꼭 먹고 가야 한다며 청어가 담긴 종이 접시를 가져왔다. 살육의 현장에서 영혼이 탈탈 털리고 있는 중의 대니만큼은 아니었지만 순간 고민에 빠졌다. 축 늘어진 생선 한 마리와 듬성듬성 양파 조각. 걸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청어의 비주얼에서 우선 멈칫했다. 그리고 이 주일 간 함께 일했던 친구가 진심을 다해 대접하는 작별 음식에 환호의 리액션을 해주지 못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청어 한 조각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특유의 물컹함이 혀를 건드다. 태국 친구는 승부차기 마지막 주자의 킥을 기다리는 선수들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맛이 을래 없을 수 없을 거라는 표정이다.


런데 맛이 없다.


공이 골문을 벗어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집념의 골키퍼가 긴 팔과 긴 다리로 유려하게 막아내는 경우. 둘째. 스트라이커가 어처구니없는 킥을 하는 경우. 암스테르담의 청어 절임은 명백히 골문을 벗어났다. 이 골을 막아내겠다는 골키퍼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거라면 어쩌면 이 낯선 생선이 결코 맛있을 리 없다고 여긴 나의 견고한 선입견이 승부를 가른 것은 아닐까.  


마트 속의 청어 절임 엑스포


때부터 얼마간은 청어의 맛을 이해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실제로 청어를 입에 넣고 그들이 짓는 황홀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 맛을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 표정은 다른 어떤 음식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맛을 청어만이 가지고 있으며  신이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처럼 다가왔.


그러니 청어는 단순히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넘어서 노력을 해서라도 이해하고 싶은 '다른 문명'대명사가 되었다. 다른 세상으로의 안착, 시크한 융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청어. 그럼 나는 비로소 청어광이 되었을까?



가장 일반적인 청어 절임


청어는 리투아니아에서도 별미로 통한다. 리투아니아인에게 해외에 살며 가장 그리울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청어 절임과 흑빵, 차가운 비트 수프 같은 것을 열거할 것이다. 가공육과 가공 생선들이 비치된 마트 코너에서 청어 절임은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명절 전에 마트에서 가장 빨리 동이 나는 식품들도 청어 절임이다.


염장된 청어는 흥건한 기름에 온몸을 푹 담그고 있다. 기름에 미끄덩 지수 같은 게 있다면 청어 기름 욕실 바닥에 실수로 쏟은 베이비오일의 그것을 몇 십배는 능가하고도 남을 거다. 기름이 실수로 옷에라도 묻었다면 입고 있는 동안은 냄새의 출처를 알려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하지만 손가락 끝의 신경 세포를 다 끌어모아 아무리 조심스럽게 비닐 포장을 뜯어도 청어 기름은 어딘가로 조금은 튀고 만다.


다 먹고 나서 플라스틱 용기를 처리하는 것도 난관이다. 최대한 모서리를 기울여서 기름이 배수구 주변을 벗어나지 않도록 잘 조준해서 버려야 한다. 먹고 남은 청어는 냉장보관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열린 채로 냉장고에 넣고 꺼내다가 흘리 거의 산업 재해이다. 가능하면 청어가 든 용기를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는 높이가 낮고 넓은 보존 용기에 넣야 한다



두 가지 소스가 곁들여진 청어


어 절임은 투아니아의 명절 식탁에 오르는 단골 음식이며 류를 제외한 12가지 음식을 준비야 하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절정에 이른다. '이불 덮은 청어 절임 silkė pataluose' 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여러 가지 념을 얹서 만드는데 양념 레시피는 형형색색 다양하다.


 양파와 당근을 풍성한 기름에 볶아서 토마토소스 거나 비트 절임에 마요네즈를 섞은 분홍색 이불로 청어를 흔적도 없이 덮어버리는 것은 나름 클래식 버전이다.  채를 볶아 굴소스나 스위트 칠리소스를 넣고 견과 뿌리는 중국식 있 스터드를 바르거나 사믹 식초만 흩뿌리는 최소한의 청어 절임도 있다.



손질 난이도 최상의 진공 포장 청어


투아니아 생활 초창기에 시어머니 청어 손질하면서도 탁에 청어 접시를 놓는 순간에도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일관적으로 ' 청어를 안 좋아하지' 말 자주 하셨다. 신은 너무 맛있는 음식인데 그걸 딱히 좋아하지 않사람 앞에서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게 담스러우셨던 것일까. 차라리 건 진짜  먹어야 한다며 국 친구처럼 들갑을 떨며 권하기라도 한다면 밀리듯 먹기라도 할 텐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먹기도 그렇고 전혀 입에 안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가 좋아하는 것들늘 환기시키고 강조기를 좋아하시니 딱히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선 불필요한 말을 계속 들으니 어쨌든  음이 편했다. 14년 전의 어린 나는 청어의 맛을 이해하는 미식가 외국인이고 싶었나 보다. 청어가 놓인 식탁의 변방에서 겉돌고 있자니 멀리 친척집에 가서 굴이 들어간 김치 앞에서 쭈뼛거리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 청어 좀 맛없어한다고 누가 구박하는 것도 아니고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도 아니며 영주권 획득 자격에 미달되는 것 아닌데 그때는 타인이 쉼 없이 건드리는 '청어를 좋아하지 않는 나'라는 정체성이 버거웠달까.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으려고 니 답 나름 좁혀졌다. 그것은 리투아니아 생활 초기에 이곳의 문화에 최대한 빨리 감쪽같이 스며들고 싶었던 이방인으로서의 내 바람과 나의 이상한 언어습관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상 반응이었다.



각종 양념이 섞인 청어 절임


'너 청어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말에 나는 찰나의 순간에 비교와 강조 기능이 있는 조사 '는'을 추가하며 뒤이어 올 법한 문장을 무한 생성했다. '너는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맛있기 때문에 청어를 명절상에 빠뜨릴 수 없.'라는 통첩처럼 확장해서 받아들였니 한편으로 지질하기 그지없다. 머릿속에서 조사 하나를 추가하는 것으로 단순한 팩트 아주 묘한 뉘앙스 장착하곤 그것은 리투아니아 생활 초기 내가 종종 빠지던 조사 '는'의 덫이기도 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우리말은 조사가 있고 없음으로 인해 문장의 뜻이 확 달라진다. 참으로 경제적이고도 드라마틱한 품사가 아닐 수 없다. '엄마가 밥 먹으래'와 '엄마가 밥이나 먹으래', '너 왜 그래?'와 '너는 왜 그래?'는 너무나 다른 말이다. 매번 적합한 조사를 고르려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우리는 거의 빛의 속도로 말하려는 의도에 맞는 조사를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조사라는 품사가 따로 없는 특정 언어를 이해할 때에도 화자의 의도를 내 멋대로 번갯불에 콩 볶듯 파악하고 오해해버렸다는 것이다.  


 

내 입속에 쓰고 달고 시고 짜고 매운맛 이외의 아직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미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청어 절임이 알게 해 줬다면  입에 맞는 청어 절임들을 발견해 나가는 것은 단순히 그 괴상한 맛을 받아들이는 미각 훈련을 넘어서 새로운 소통 방식에 정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활한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이 어휘력과 문법 습득뿐이라면 차라리 쉽다. 의사소통에도 맛을 이해하는 미각 같은 것이 존재하니 새로운 언어가 입속에 들어오면 모국어에 최적화된 언어 감각 조금씩 무뎌지며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발사믹 식초와 간장 양념만 부운 깔끔했던 청어


간의 민의 무나름 컸던 것인지 '모두가 청어를 좋아할 순 없다'라는 각으로 리투아니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청어를 좋아하냐고 묻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청어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할 급진적인 반 청어 주의자들을 호시탐탐 노린 결과 확실히 나이가 어릴수록 청어를 기피하고 나 몰라라 하는 향이 해졌다. '역시 모두가 청어를 좋아할 순 없어'라고 생각하니 통쾌하기도 했지만 청어도 누군가에게는 외면받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자 한편으론 청어가 처량해졌다. 청어의 맛을 이해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느슨해진 느낌이 들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은근슬쩍 청어에 포섭되었다.



그때부터 불특정 다수를 향한 나의 청어 설문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청어 요리 레시피를 묻는 으로 바뀌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열이면 열 행복해했다. 모두 저마다 조금씩 누군가에 굴러온 돌이. 남의 마당에 굴러 들어돌이 마당의 잡초도 제멋대로 밟아선 안 되겠다는 조심스러운 자세를 지닌다면 마당 주인들 역시 예민태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러니 그들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방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당연하다.



원하는 만큼 무한정 살 수 있는 청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14년째 청어 입문 중이라 농담 섞인 말곤 한다. 그러면 좀 더 수월한 입문을 돕기 위한 각자의 팁을 전수하려고 다들 혈안이 된다. '네가 그런 이상한 청어들만 먹어 왔기 때문에 청어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거야'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부터 특정 마트의 특정 상품을 언급하며 청어 절임의 새로운 길잡이가 되어 주려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그들 사이 청어 논쟁에 불이 붙기도 한다. 청어는 그렇게 리투아니아인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는 하이패스였다. 그래서일까. 청어의 맛을 이해하고 싶다는 집착 같은 것은 없어진 지금도 청어는 여전히 현지인들과의 장벽을 허무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무언가에 있어서 만년 입문자로 남는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어 절임일 수도 있고 힘든 보드카 일수도 있다. 비가 올 것처럼 늘 우중충한 날씨,  난방 시작 전의  얄궂은 10월 기후. 여름이면 빌니우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열기구, 소복이 쌓인 눈 위에서 반짝이는 이른 봄의 햇살일 수도 있다. 한때는 그 이물감을 극복하고 싶어서 날 안달 나게 했던 들 혹은 감탄사를 연발 푹 빠져 있었지만 제는 숙해져서 시큰둥해진 것들도 수두룩 하다. 그러니 늘 다시 모든 것의 입문자로 돌아가려고 한다. 끊임없이 초심자 모드로 스스로를 리셋하지 않으면 루함과 권태 이때다 하고 어디서든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손님맞이 명절용 대형 청어 필렛


리투아니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길을 가다 넘어지면 '청어를 잡았구나! Silkę  pagavai!'라고 유쾌하게 말한다. 아이들이 넘어지는 모습이 마치 청어를 맨 손으로 때려잡는 모습처럼 통쾌하고 박력이 넘쳐서인지 아니면 별미인 청어를 잡았으니 넘어져서 조금 아프겠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격려의 의미인지 고등어, 송어, 대구, 연어, 정어리도 있는데! 굳이 청어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그 찰나의 순간에 기특하게도 그 의미를 파악한 것인지  멋쩍게 웃으며 일어선다. 이 어린아이들에게 청어의 맛을 감내하는 특유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아이들은 단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아동들의 미각을 지녔지만 청어를 대하는 바람직한 발트인의 자세 또한 탑재하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누구든 한 명이 넘어지면 청어를 잡았다며 통쾌해하기까지 한다.



군웅할거 중인 청어 절임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청어를 즐기 수십 번 고꾸라지며 청어를 잡으며 커가는 아이들과는 달리 아쉽게도 난 여전히 청어 마니아가 되진 못했다.  양념이 없는 벌거벗은 청어는 앞으로도 쭉 힘들 예정이다. 하지만 청어가 보일 때마다 맛은 꼭 본다. 여전히 수십 마리의 청어들이 소스에 뒤범벅된 채로 내가 맛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늘 맛은 보지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더 이상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14년 간의 청어 수련의 결과이다.



<미드 소마>에서 대니는 기겁을 하며 청어를 내뱉지만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오히려 환호한다. 대니 역시 민망한 상황을 웃음으로 넘긴다. 그리고 축제는 막바지로 치닫는다. 두 팔 벌려 안아줄 순 없지만 달려오는 너를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수용이라는 것 청어 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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