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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Oct 23. 2022

그와 그녀의 커피, 우리의 커피


'사람을 볼 때 뭘 봐?' 글쎄.


'람을 알려면 이것을 봐'의 많은 버전이 있다. 신고 있는 신발을 보라는 람이 있고 손톱을 보라는 사람 있고 말투, 표정, 치아, 그 사람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 듣고 있는 음악 같은 것을 보는 사람도 있. 이도 저도 다 필요 없고 학벌과 집안, 사는 곳, 수입, 바디 프로필 같은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을 거다. 


'그 사람이 마시는 커피'는 어떨까.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를 꽤나 주의 깊게 보는 편이다. 커피와 차 취향은 물론 맥주면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주력 주종은 무엇인지 심지어 물을 마시면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등등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최소한 '그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마신다'라는 문장 한 줄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는다.


매 번 새로운 사람을 만다고 해도 그들과 늘 카페로 향할 수 있는 것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카페에 간다는 것은 꽤나 내밀한 행위가 아닐까.  둘 사이의 커피 테이블을 온전히 함께 끌어안고 공유한다는 것이며 그 시간은 영원히 둘 만의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 최고로 어색했던 커피 타임'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이미 인생 타이틀을 지니는 것처럼.


 머릿속에 수집된 수십 잔의 커피와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영화일 수도 있고 소설 속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여행 중에 마주 텅 빈 커피 잔일 수도 있다. 아로마 휠 빙그르르 돌려 어떤 커피의 맛과 향을 찾아내 특정하는 것처럼 축적된 추억들을 더듬어서 어떤 커피를 고 음미한다. 그 커피들이 항상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는 것 아니지만 떤 커피가 그인물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식탁 위에 놓인 단순 소품일 뿐인 순간에도 그것이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세심하게  본 무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좀 달리 보기 시작한다.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취향일 수도 있고 그가 사랑했고 잊지 못하는 누군가의 습관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그것은 누군가의 취향이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고 서성이는 것만으로 그들의 감정 화면 밖의 나에게로 묘하게 전이된다. 세상의 모든 커피에 정관사를 달아 줄 필요가 있다.  모든 커피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유형이 될 수 있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10월의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반의 나뭇잎들이 아직은 호기롭게 가을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커피를 마신다. 앤디 맥도웰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좀비가 된 이기 팝간이식당 커피메이커의 눅눅해진 커피나눠 마신다. 코르타도를 앞에 두고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 네오와 트리니티 옆 스윽 지나가며 멀찌감치 앉아 나도 마신다. 


그런 몇 잔의 커피들을 추억려고 한다. 커피 한 모금에 진하게 스며들던 누군가의 커피 예찬도 떠올려보고 거창한 철학 따위는 없지만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그들이 무심코 뿜어내 고독이나 절에 대해주 위함이다.





<그린카드>의 앤디 맥도웰, 카페 '아프리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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