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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관우 Jan 06. 2020

무박 정동진 Time Log

낭만과 청승 사이

이상하게 나는 연초보다 연말에 마음이 더 들뜬다.

희망찬 새 해를 맞이하며 하는 새로운 다짐보다

일 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를 되돌아보는 회고를 더 즐긴다.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그렇다. 난 약간 질척대는 사람인 것 같다.

질척 고수가 추천하는 나에게 질척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의지할 곳이 나 밖에 없을 때

적당히 안정을 찾고 심호흡하면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군대 말차 휴가를 나와서 처음 혼자 떠난 제주 여행을 시작으로 나는 자주 혼자 여행을 떠났고 작년 연말에는 휴대폰을 놓고 수서역으로 떠나 가장 빠른 기차를 예매해 군산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군산에서 나는 18년 한 해를 되돌아보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 수 있었고 노을 지는 금강을 바라보며 19년 목표와 지독한 감기를 얻었었다.


19년도 어김없이 연말이 다가왔다. 이번 여행은 2019년 마지막 해를 보기 위해서 12월 30일 23시 20분에 출발하는 정동진행 기차에서 시작한다.


19.12.30. 3:00 PM

회사 동료 B에게 카메라를 빌렸다.

B는 회사 중고장터에서 이 카메라를 75만 원에 사서 배터리까지 10만 원을 주고 교체했지만 실사용 횟수는 3회 미만.ㅋ

아마 가까운 시일내에 나에게 팔 것 같다.


19.12.30. 10:00 PM

퇴근 후 바로 떠났다. 1호선에는 듣던대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코리안 조커들을 구경하며 드디어 청량리역 도착.

청량리역 앞에 취향저격 포차 거리가 있다.

'직장인이 되면 혼자 포차에 앉아 술 한 잔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라는 소원을 이룬 제주 촌놈


19.12.30. 11:15 PM



정동진행 무궁화 호 열차 탑승.


이 표는 코레일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매진이 떠서 못 구할뻔하다가 투어레일 여행사에서 확보해놓은 표를 네이버페이를 통해 21,000원에 구매했다.


솔직히 30일에 해보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했는데, 입석도 꽉 찼다. 미리 예매하자.


19.12.31. 02:15 AM



이 의자는 무궁화호 의자다.

언뜻 보면 양쪽으로 머리 받침도 있고 괜찮아 보이지만 참 인체공학적으로 불편하게 만들어졌다.

전세계에서 앉은 키를 재는 나라는 한국과 한반도 동쪽에 작은 섬나라 밖에 없다는데, 그 데이터를 왜 활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던 짧은 등받이가 있었고 그 등받이 중간에 배려의 아이콘으로 들어간 머리 받침은 어깨를 한없이 좁게 만들어야 등을 기댈 수 있는 구조를 낳았다.


웬만하면 꿀잠자는 스타일인데 이 의자에서 평소처럼 잠을 자다가 허리가 끊어질 뻔했다... 고통쓰...


19.12.31. 04:45 AM

의자에 고통받던 차 너무나 반가웠던 정동진역.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많은 인파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이 많은 사람이 기차에 타있었다고!?

정동진역에는 새벽 3시에 오픈하는 카페들이 3개 정도 있는데, 인파를 보자마자 카페 자리부터 잡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해외였으면 이 생각이 먹혀서 내가 제일 먼저 플랫폼을 빠져나왔을 텐데

여기는 한국이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어글리 코리안들이었다.

어깨 운동을 더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플랫폼을 겨우 빠져나왔다.


19.12.31. 05:00 AM

겨우 카페에 자리 잡았다.

최강 한파가 몰아친 날이지만 얼죽아를 외치며 아아를 주문했다.

어떤 웹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따뜻한 라떼 한 잔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한동안 따뜻한 라떼를 마셨는데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없어 그냥 해!) 역시 한국사람은 아이스.


해가 뜰 때까지 이북리더기로 책을 조금 읽다가 2019년 회고를 했다.


19년 목표는 세 가지였다, 연봉 협상, 영어 공부나 다이어트 같은 자기 개발, 그리고 가족과 애인에게 잘하기.


구글 포토를 열고 하루하루 사진을 보며 그때의 감정을 되살렸다.

운동을 하고 저녁을 거하게 먹은 날은 또 왜 이렇게 많았을까? 망할 놈.

아버지와 있던 시간은 왜 그렇게 귀찮아하며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을까? 못된 놈.

애인에게 소홀했던 날들은 왜 이렇게 많았을까? 못난 놈.

(헤어짐의 이유를 깨달음...!)


2019년은 망할 놈, 못된 놈, 못난 놈의 해였다.



19.12.31. 07:00 AM

불신하지만 맹신하는 기상청에서 예보한 일출 시각은 오전 7시 47분.

하지만 우리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일곱 시부터 해안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2019년 마지막 실수.

진짜 몹시 추웠다. 체감 온도 영하 20도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 뜨기만을 기다리는 건 세상 고역이었다.

생각해보면 일출 예정 시각은 정확할 수밖에 없는데 왜 못 믿고 일찍 나갔지?


19.12.31. 07:50 AM

드디어 2019년 마지막 해.

1년 동안 마주한 적이 얼마 없었는데 마지막이라고 이렇게 찾아온 게 새삼 미안했다.

회고하면서 올 해는 실패했다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해를 보니 마음이 뜨거워지며 긍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내 2019년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온전했다. 꾸준히 나였고 29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느리지만 주변을 볼 수 있는 속도로 항상 움직였으니 그걸로 되었다!

JOB것들의 리더, 장성규가 말한 수상 소감처럼 나의 주제에 맞는 속도를 잘 찾아서 나에게 어울리는 속도로 한 걸음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웠어 2019년! 20대의 강관우!


(여름 해는 정동진 해안 가운데, 겨울 해는 사진과 같이 오른쪽 끝에 걸쳐집니다. 해안 오른쪽으로 가면 해를 보기 힘들어져요. 자리 잘 잡으세요)



19.12.31. 08:30 AM


한껏 속으로 주접을 떨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그냥 주변에 보이는 일출식당으로 들어가 초당 순두부를 주문했다.

정동진 여행 글들을 보면 대부분 순두부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던데 왜 강원도까지 가면서 순두부를 먹나~했지만 일단 주문했다.

얼죽아를 외치듯 순두부는 얼큰이지! 라고 외치던 나의 편협한 사고는 여기서 크게 혼났다.

진짜 JMT. 세상 심심한데 세상 간이 잘 되어있다. 난 이런 모순덩어리가 좋더라.


19.12.31. 09:30 AM

원래 계획은 정동진에서 12시까지 한량처럼 돌아다니다가 12시 첫 기차를 타고 강릉에 와서 강릉 주변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3시쯤 KTX 타고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30살(진)의 체력은 매서운 칼바람에 다 날아갔고 뜨뜻한 순두부 한 그릇하고 나오니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강릉시까지 택시 타고 점프!

저렴이 여행을 계획하며 예매했던 무궁화호를 취소하고(정동진-강릉 2천 원) 택시비 2만 원의 부담감과 현대 쏘나타의 안락함을 함께 느끼며 Flex해버렸다.

그렇게 강원도 택시기사님 피셜, 강릉 시내에서 시설이 제일로 좋다는 "사우나"를 찾아갔다.

역시 동네 관광은 택시기사님! 의 추천은 믿고 거르자. 여기 진짜 별로다.

샤워기 온도 조절도 젠가 하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했고 시설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사우나인데 탕 안에 때가 떠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닌가?


19.12.31. 10:30 AM


그렇게 여차저차 사우나를 하고 강릉역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서 10시 30분 KTX를 탔다.

막상 집에 돌아가려니 너무 여행지를 찍고만 가는 건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쉬움이 있으니 다음에 또 오지 않을까?


정동진, 이렇게 쉽게 올 수 있으니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일출을 보고 싶은 2020년 어느 날 훌쩍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낭만과 청승 사이, 나의 20대 마지막 해돋이 여행은 이렇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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