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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Nov 18. 2021

우리 같은 사람들

간호일기

우리 같은 사람들


소장님! 너무 일찍 문자드려서 죄송합니다(눈물) 예방주사 맞으러 7시 쯤 가도 될까요?(메시지/56세) 회사 일이 이제 끝났습니다. 잠시 들러서 주사 좀 맞고 싶습니다(카톡/62세). 소장님! 학교버스가 7시 넘으면 오거든요. 내일 아침 6시 반에 가도 될까요(카톡/16세). 어르신 돌봄이 3시 넘어 끝나요, 오전에는 시간을 낼 수 없어서요. 아침 출근 전에 가고 싶은데요, 몇 시쯤 가면 좋을까요(메시지/58세). 휠체어 타는 어르신인데 모시고 가야 하나요? 가정 방문 출장 접종해 주면 안 되나요?(생활지원사). 택시 기사가 오래 기다릴 수 없다고 하는구만요. 몸이 불편해서요. 마당에서 주사 놔주면 안 될까요?(전화/78세) 소장님 우리 새끼들 좀 놔줄랑가요? 핵교뻐스가 일곱 시 반에 옹개로, 예예, 그럼 냘 식전에 가것습니다(전화). 코로나 주사를 그저께 맞았는데 독감 주사 맞아도 되나요? 카톡카톡카톡….


  “40번에서 45번, 들어오세요! 여기 앉으시고요, 예진표 주세요.” 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 사업이 시작되었다. 길면 한 달, 짧으면 2∼3주 만에 끝나는 집약적(!) 업무이자 가장 많은 주민을 만날 수 있는 계절 사업이다. 계획이 세워지면 보건의료원에 백신을 신청한다. 수량의 근거는 전년도 결과에 기인한다. 백신 냉장고를 점검한다. 정상 작동하는지, 시간별 냉장 온도 그래프도 확인한다. 이장님들에게 일정이 전달된다. 마을 방송이 메아리치면 주민들의 문의는 다양한 채널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형편들이 설명된다. 편한 날짜 결정하신다. 내꺼 꼭 하나 남겨 두라는 찜(!) 예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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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관리청에서는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하여 1일 예진 1인당 최대 접종 가능 인원수는 100명으로 제한한다. 보건진료소에서 하루에 100명이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예방접종 전에 본인 또는 보호자가 예진표를 작성하도록 권장되지만, 본인이나 보호자가 직접 작성하는 일은 십중 일이(一二)이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휴대 전화, 서식에 명시되지 않은 주소까지 기록하는 일은 대부분 나의 몫이다. 개인 정보 처리 동의와 오늘 아픈 곳이 있는지, 약물이나 계란 두드러기 유무, 이상반응 경험, 면역 질환, 경련 유무, 3개월 이내 스테로이드제, 항암제, 방사선 치료 노출 여부, 수혈 유무, 여성의 경우 임신 가능성 여부까지 확인.


  138번 대기자가 예진표를 내민다.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진료대기실에서는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이 오래간만에 만나니 안부가 요란하다. 사람 드나드는 소리, 전화벨 소리, 카톡과 메시지 알람, 나는 무엇부터 대응해야 좋을지, 멍해지는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보건진료소처럼 1인 근무 체제에서 매일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정말이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 접종을 마치면 예방접종통합관리시스템에 성명을 입력한다. 접종명, 로트번호, 접종법, 백신 용량, 접종 부위, 유료 무료 선택, 저장 단추 클릭하면 한 건의 접종 내역이 전송된다.


  소장님! 술 마셔도 되죠? 샤워해도 됩니까? 농반진반 우스개부터 나락 타작하다 와서, 들깨 타작하다 와서, 빨리 논밭으로 가야 한다는 무수한 가을걷이 뒷말들. 접종 후 음주나 지나친 운동, 샤워는 피해야 하고, 반나절 이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겠다. 그렇게 오전이 훌쩍 날아간다. 심호흡하고 마당으로 나와 본다. 문지르다 버린 알콜솜이 붉은 남천나무 가지에 저 혼자 희다.


  해 질 무렵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소장님! 우리 같은 사람은 집으로 와서 놔줘야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어앵부앵하다가 작년에도 못 맞았는디. 응?” 나는 내일 해드리겠다는 말씀도, 그렇게 못한다는 대답도 못한 채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무엇이 확신을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아나필락시스에 대한 응급처치 약물과 장비가 충분한가, 보건의료원과 후속 조치가 마련되어 있는가. 순간적으로 질문이 맴돌았다. 어르신에게 반드시 아나필락시스가 올 것도 아니고, 걸어가서 접종해도 30분이 채 안 걸리는 일이건만, 그 와중에 파장으로 울려 번져드는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말.


  옳다. 앞이 안 보여 보건진료소에 걸어올 수 없는 사람, 말을 못 하니 상황 설명할 수 없는 사람, 귀 안 들리는 사람, 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난감함을 마주하고 있는 보건소 사람들이 있다. 의료법에 예방접종은 의료기관에서 해야 한다고, 출장 예방접종은 제한한다고, 꼭 필요하다면 백신 콜드 체인 유지하고, 접종 후 대기 장소 확보하고, 응급처치 세트와 구급차 갖추라! 최선의 지침인데 어찌 불친절해 보이는 것일까. 지정된 장소와 시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자리가 12시에 끝나요, 골프장 근무가 1시에 끝나요, 식당 일이 3시에 끝나요, 못 걸어가요,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이래요, 저래요.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은 겨울 김장처럼 든든한 업무이다. 별 이상 없이 일주일이 지나가면 스스로 수고를 다독인다. 65세 이상 어르신 접종률은 65.2%, 사업 대상 연령이 달랐던 작년에 62세 이상 어르신 접종률은 73.7%. 단순 비교에 무리가 있지만, 질병관리청 2019-2020절기 접종률 80.68%가 눈에 띤다. 80.68에 들어오지 못한, 19.32%의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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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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