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일기
“소장님! 주사 한 번만 더 놔주세요. 도저히 번열이 나싸서 못 전디것네요.”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지더니 진료실로 황급히 들어서는 김씨. 술에 취했을 때보다 더 불콰해진 얼굴로 진찰 침대에 올라가 엎드린다. 평소 뒤로 묶은 꽁지머리가 참 우아한 김씨. 페니라민과 베타메타손 주사 두 대나 맞고 돌아간 지 두 시간도 채 안 됐는데, 또 오신 것이다. 한두 시간 지나고도 불편하면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일렀던만. 나는 메타혈압계를 끌어당겼다.
평소 그의 고집을 알기에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의 이러한 자신감 배후에는 벌통 옆에서 지내니 꿀벌이 그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한두 방은 기본이고, 어느 때는 열 방, 가끔은 스무 방도 더 쏘인 괴로움을 이겨낸 과거력에 기인한 자가 경험 결과치랄까. 그의 믿음(?) 위에 내가 다소나마 안도한 것은 두 시간 전보다 안정권에 들어선 바이탈 사인이었다. 혈압 110/60mmHg. 맥박 78회/min, 몸 온도 36.2℃. 환경이나 자신에 대한 인식 지표 의식이 알러트(Alert)!
한낮 더위를 피하여 들 밭에 나갔던 김씨. 예초기 짊어지고 논두렁 풀베기 중 무심하게 놓여 있는 낡은 의자를 건든 순간, 그야말로 벌떼처럼 달라 든 벌떼 공격을 받은 것이다. 열여덟 방도 더 쏘였다고 하셨다. 두 다리와 얼굴, 목둘레, 토시로 감춘 팔과 손, 몸속까지 집요하게 파고든 벌들의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벌에 대한 특이 알러지 반응 별로 없고, 그 까이꺼 무섬탐도 없어 그러려니 넘기는 중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과 화끈거림을 이길 수 없어 달려오신 것이다. “어정칠월이라는디, 걍 어정어정 놀기나 할 것을 괜히 벌집 건드려서 생고생이고먼요.” 김씨가 웃는다. 웃는데 웃는 것이 아니다. 근육 부종으로 뒤틀려 일그러진 표정 앞에서 나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진통소염제 섞은 약봉지 들고 돌아가는 김씨 꽁지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너울너울 함께 걷는다. 그날 오후였다. 마당에서 소나무 전지(Trailing)하다가 입술과 오른쪽 팔에 벌 쏘였다며 이씨가 오셨다. 잠시 후에는 꽃밭에 앉아 잡풀 뽑는데 허벅지에 벌 쏘였다며 박씨가 오셨다. 그들이 호소하는 증상은 대부분 통증과 가려움이다. 부풀어 오른 입술과 팔을 살피고, 허벅지를 살피면서 마음속으로 제발 아나필락시스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벌침을 제거하고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제 주사를 시행하였다.
음력 칠월이다. 여름꽃은 화려해지고 수목은 두려울 정도로 무성해진다. 숲이 무성해지는데 곤충이라고 예외일까. 바쁜 꿀벌과 독 오른 뱀, 모기와 깔따구, 초파리와 바구미, 그리마와 꼽등이 등. 초여름이 지나고 장마와 한여름이 이어지면 우주 모든 벌레 기운도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논밭이나 산에서도 그렇지만, 보건진료소 마당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해마다 겪는 일이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지극히 혐오스러운 그것들.
칠팔순 어르신들 목덜미에 자신의 머리를 쳐 박고 꽁지와 다리만 꼼지락거리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의 진범 진드기들. 울타리 담장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뱀이나 현관에 들어오는 뱀들, 어느 해는 소파 밑까지 들어온 뱀에 기겁한 적도 있다. 누구의 집에 가든 주인 몰래 소파 아래부터 살피는 뱀 트라우마.
농가에서는 별로 할 일 없이 어정거리다가 한가하게 지나가 버린다는 음력 칠월. 가장 뜨겁고 덥고 습한 장마에 지쳐 잠깐 게으름 피우다 보면 어느새 수북해진 잡초의 기세에 놀라고 만다. 코로나19는 차치하더라도 농민을 괴롭히는 것이 어디 잡초뿐이랴. 지난 해 ‘비(非)독액성 곤충 물림’ 증상으로 보건진료소를 찾은 환자는 35명이었다. 풀 매다가, 벌초하다가, 나무하다가, 청소하다가 벌에 쏘이고 곤충 물림에 노출된다. 연일 32∼36℃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 곤충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예민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 탓일까. 벌이 없으면 인류는 4년 내 멸망한다고 한다. 꿀벌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일부 과채류에 한정하여도 약 6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유럽 쪽에서는 농림업 생물자원 중 소, 돼지에 이은 3위라는 결과가 있고, 미국에서는 벌에 쏘여 사망하는 사람이 뱀에 물려 사망하는 사람보다 3∼4배 더 많았다는 결과도 있다.
며칠 후 보건진료소에 다시 오신 김씨. 허리 아픈 약을 달라시더니 작은 꿀 병 하나 내미신다. 맑고 투명한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아까시꽃꿀. 큰 수저로 한술 떴다. 따끈한 물에 섞어 휘휘 젓는다. 이제 얼음을 넣어야지. 시원하고 달콤한 꿀차! 한 모금 마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네, 보건진료소입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소장님! 소장님!! 진료소 마당에요, 큰 뱀, 진짜 큰 뱀이 있어요, 꼼짝도 안 해요, 아, 진짜 어떡해요? 저를 째려보고 있다고요! 엉엉! 119에 신고할까요?” 후배 진료소장 목소리는 다급했다. 거의 울상이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어디론가 사라지려니 했는데, 옴짝달싹 안 하고 있다고, 어쩌면 좋으냐고! “마당에 나가지 말아요, 빨리 신고해요,” 조언의 전부였다.
에어컨을 틀었다. 현관을 닫으려 일어섰다. 문의 안전장치 채우려고 돌리는데, 열쇠 구멍에서 벌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이다. 깜짝놀라 에*킬러를 들고나왔다. 구멍에 대고 마구마구 품어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뭐야. 왜 계속 나와. 어디든 안전한 곳이 없구나. “소장님! 119에서요, 대원님들 오셔서요, 그 뱀, 잡아갔어요.” “아, 그래요? 잘됐네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심하세요.”
한입 머금은 꿀차. 아아, 달콤하다.
깐깐오월 꽃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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