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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Feb 27. 2022

봄처럼

간호일기

봄처럼


문 열고 들어가면요, 침대 오른쪽에 사단 문갑 있거든요. 밑에서 두 번째 서랍 열어보시면요, “아, 잠시만요. 이따가 방에 들어가서 전화하겠습니다.” 나는 출근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는 통화를 멈췄다. 이웃 김씨네 안방에 들어가 본 일이 있었던가. 친절한 설명을 들어도 깊숙한 가구 배치도는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른쪽 문갑, 밑에서 두 번째 서랍, 오른쪽, 두 번째, 짧은 단어들이 어떤 암호처럼 기억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털모자를 눌러쓴 강씨가 진료실로 들어선다. 찡그린 표정으로 발목이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고 하신다. '김씨네' 밭 닭장에 ‘달구새끼들 닥모시 주러’ 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졌다는 것이다. 진찰대에 걸터앉은 어르신 발목을 살폈다. 잠시 후 이씨가 보건진료소에 들어선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는 숨을 몰아쉬며 말씀하신다.


  “소장님! 머시냐, 거시기, 저, 김가네 문 앞에 쌓인 택배를 어떻게 하면 좋것는가요?” 쥔이 올 때까지 내비 둬도 되는지, 끌러봐서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 것인지, 라고 재차 물으신다. 이런 난감함이라니.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세 번. 여전히 안 받으신다. 우리 세 사람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참 별시랍네. 멀쩡허던 사람이 왜 갑재기 아프다는 거여! 별일 아녀야 헐틴디./ 이 사람아, 병원에 간 양반이 암 일 아니면 보름이 넘더락 안 오겄는가, 머싱가 변이 생긴 모양이여./ 금메 말이여, 참말로 깝깝허네잉. 

  김씨의 부재. 그가 병원에 갔다고 아니,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사람들을 술렁이게 했다. 도대체 무슨 진단을 받았을까, 언제쯤 마을로 돌아오실까. 진료대기실에 사람들이 모이면 아플 때 자꾸 전화해대는 것도 짜증시런 일이니 자제하자는 사람부터 귀찮아할까 봐 전화도 못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그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리라. 뒷산 그림자 서서히 마을을 내려 덮어 오는 시간, 김씨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멈춰 있다. 정지 화면이다. 이불, 옷가지들, 사진 속에 담긴 가족과 지인들 미소,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투명한 방 안의 공기. 침대 옆 문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른쪽, 밑에서 두 번째, 밑에서, 두 번! 서랍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거기에 약 봉투가 있었다. 복용법 식사 전. 하루 한 번. 두툼한 봉투를 휴대폰 사진에 담았다. 이것을 보내라는 말씀인가요? (메시지) 보건진료소로 김씨의 당뇨약을 가지고 왔다. 택배 상자에 담아 주소를 적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내 나이 일흔아홉 어느 날. 나는 홀로 살고 있다. 갑자기 가슴이 혹은, 머리가 아프다. 119를 불렀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 한다. 대학병원 담당의는 정밀검사까지 해야 하고 2주 이상 입원하라 처방하신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누구에게 펴다 만 텃밭 거름을 마저 펴달라고 말할까. 아니,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울타리를 기웃거리다가 텃밭을 밟아 줄 그런 사람이 있는가. 급하게 병원에 오느라 두고 온 혈압약이나 당뇨약을 안방에 들어가 찾아서 택배로 보내줄 사람, 닭들에게 매일 모이를 줄 수 있는 사람, 보일러가 동파되지 않도록 군불 지펴줄 사람, 수돗물이 얼지 않도록 쫄쫄쭐, 알아서 틀어줄 사람, 일주에 한 번 베란다 제라늄에게 물 좀 줄 그런 사람, 사람사람사람.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아이를 위한 토탈 시스템의 전폭 조력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 한 명을 돌보기 위해서는 몇 사람, 몇 마을이 필요할까.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고, 어른들은 노인이 된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노화의 진실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사라진 농촌, 그것도 모자라 변방(邊方)은 곧 소멸할 것이라는 비루한 논의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작금. 농촌에서 태어난 아이가 농촌에서 자라고 농촌에서 노인이 된다면! 아주 천천히 더 외로운 사람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흔아홉의 나는 내 곁에 머무는 외로움과 베프(Best friend)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어르신 한 명에게는 한 아이에게 필요했던 마을보다 더 크고 큰 여러 마을이 필요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응급실을 전전하다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자잘한 심부름부터 가축 돌보는 일, 택배 우편 정리, 보일러와 상하수도, 집 건물까지 돌봄(Care) 대상이 된다. 주인을 대신하여 이웃과 지역사회 자원은 공적(公的) 통합 돌봄의 연대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노인 한 사람 돌보는 데에 필요한 것은 온 마을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야 마는 계절처럼 환히 웃으며 돌아올 김씨를 기다린다. 소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뜨거운 보리차 한 잔 주변으로는 강씨와 이씨도 둘러앉을 것이다. 닭이 낳은 계란 이야기, 발목 타박상 이야기, 보일러 이야기, 김씨는 병원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보따리로 풀어 낼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보건진료소 단풍나무에 봄이 도착했다. 새 줄기마다 붉게 오른 물빛이 봄빛에 흔들린다. 해마다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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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읍,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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