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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09. 2022

해토

간호일기

해토



응급실로 가야 하거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환자의 경우, 퇴근 후라든가 업무가 시작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안타깝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근무 중에는 외부와 연결된 의료시스템 안에서 상황이 종결되지만, 규정 시간 외에는 어쩌지 못하니 그렇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퇴근 중이더라도 환자가 병원으로 가는 시간보다 내가 보건진료소로 돌아가는 시간이 짧은 경우라면 가던 길을 유턴하기도 한다. 이웃 마을 김씨 경우도 그러했다. 퇴근길에 돌아와 보건진료소 마당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현관 앞에 앉은 채 손가락을 쥐고 있었다.


  천마 종균 작업 중 손을 다쳤다고 했다. 열 바늘 이상은 족히 봉합해야 할 깊은 열상(裂傷)이었다. 참 나. 재수가 없으려니깐. 하필이면 오른손을 다칠 게 뭡니까. 식염수로 환부를 씻어내는 동안에도 그는 못내 아쉬움은 털어냈다. 붕대 감은 손으로 트럭을 몰고는 병원으로 향했다. 또 다른 김씨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바위를 움켜쥔 땅속 큰 나무 뿌리가 찢어질 때, 땅과 나무에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큰 신음을 낼까. 바윗돌이 익어버린 두 다리를 짓누를 때 으스러지는 고통을 그에 비할까요?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로 바닥을 딛는 순간 말이죠, 평소에는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통점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렇게 깨어나는 것인지.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되면 말이죠,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최극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나 할까. 너무 아파요. 한 발만 내디디면 두 발짝 세 발짝은 걸을 수 있는데 말이죠. 정말 소독할 때마다 지옥문에 다녀오는 기분이라니까요(웃음).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의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화상 환자가 겪는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비유되는 드레싱 교환의 공포를 어찌 모를까. 그 김씨의 전화도 퇴근 무렵이었다. 진료실 문을 잠그고 나서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지금 진료소에 계시느냐고. 비화(飛火)처럼 스쳐 가는 불운한 직감. 마당에 선 채 통화는 계속되었다. 그의 첫마디는, 과수원에서 일하다가 황에 씌었다고 하셨다. 


  황에 씌었다고요? 황? 이 짧은 단발적 단어에 질문이 이어졌다. 때로 테러를 일으킨다는 무서운 그 황? 내가 상상 속으로 달음질하는 동안 김씨의 설명은 이어졌다. 사과나무 새순이 돋기 전 병충해 예방을 위해 황 작업을 한다고. 황은 살균력도 좋고 응애나 깍지벌레 살충력이 좋아서 과수 농가에서는 해마다 뿌린다고. 그런데 수압을 견디지 못한 호스가 터지면서 분사액이 얼굴이랑 다리를 적셨다는 것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나는 망설이지 마시고 119를 부르라고 했다. 화학적 화상(chemical burn)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험실에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밭에서 일어난 것이다. 뜨겁거나 차가운 냉온열에 의한 화상이 아니라 강산 혹은 강알칼리성 물질이 일으키는 화상. 화학 약품이 매우 뜨겁거나 차갑지 않으니 연무에 노출된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눈 점막, 얼굴 피부 손상은 물론이고 심하면 체부 조직 손상을 일으키는 3도 화상까지 입는다. 손상 과정에 통증을 유발하지 않으니 환부는 더욱 깊어진다.


  겨우내 감겨 있던 고무관 어느 부분이 낡아졌을까. 그래서 발로 밟는 순간 터져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따뜻해지면 하라고, 뭐가 바빠서 서두르느냐고, 그렇게 말려도 밭에 나가더니, 그날따라 방진 마스크도 안 쓰고, 비옷도 안 입고 하더라니! 김씨의 아내는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김씨는 김씨대로 빨리 마치고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오염된 몸으로 남은 일을 마무리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화상전문 병원에 입원하셨다. 피부이식 수술도 앞두고 있다. 나는 두 분의 완쾌를 진심으로 바라고 바란다.


  소장님! 빨리 소독 좀 해주세요. 오늘따라 장갑을 안 끼었더니. 소장님! 치료 좀 해주세요. 그날따라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등등. 그날따라 챙기기 않은 그 무엇, 깜빡 방심한 어떤 이유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 후 우리는 각성한다. 오늘따라 그날따라 간단한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초목들이 기나긴 겨울 휴면에서 깨어나고 있다. 뿌리는 해토를 품고, 줄기에는 닫혔던 수관이 열린다. 새잎이 돋고 꽃이 피는 계절이다. 농부들도 덩달아 바빠질 것이다. 보건진료소에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환자들도 당연히 농번기에 더 오신다. 농작업 중의 사고, 농기계에 의한 사고들이 설비적 결함에서 빚어지는 것보다 일하는 사람의 부주의(不注意)에 기인하는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환기시킨다.


  시속 80km구간입니다. 속도를 줄이십시오, 라는 안내 네비게이션처럼 당신의 주의력이 1%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라든가 안전장치가 미흡합니다!라고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 있다면, 안전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고 줄일 수 있지 않을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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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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