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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이 Apr 22. 2024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

<단순한열정>, 아니에르노

사실 그 순간은 단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얼음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가서 문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후면 저 사람은 가고 나만 혼자 남게 되겠지" 하는 말들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양말을 신고, 팬티와 바지를 입고 나서 넥타이를 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이 떠나자 엄청난 피로가 나를 짓눌러왔다. 곧바로 집안을 정리하지 못했다. 나는 유리잔, 음식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접시,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방바닥과 복도에 흩어져 있는 겉옷과 속옷 들, 카펫에 떨어진 침대 시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미술관에 소장된 다른 어떤 그림도 내게 주지 못할 힘과 고통을 간직한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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