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처럼 단순명료한 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김의성이라는 배우가 평소 어떤 소신을 가진 배우인지 알면서도 영화를 다 본 이후에도 그가 연기를 한 캐릭터를 생각을 하면 화가 치밀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부산행의 장르는 스릴러가 맞다. 피부에 소름이 바짝바짝 오를만큼 공포스럽고 그 공포를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니 다른 장르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공포를 조장하는 존재는 영화에서 전면으로 내세우는 좀비가 아니다. 인간이다. 좀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이 가장 무섭다. 이렇게 말하면 제작진에게는 미안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좀비에 비해 부산행의 좀비는 좀 어리숙하고 귀엽다. 기차의 문을 못 여는 좀비라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유리 창문 너머에 있는 좀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일은 유리창에 물을 뿌리고 신문지를 붙여 버리는 일 아니었나 말이다. 정말 치명적으로 단순하다. 너무나 치명적으로 단순하다. 좀비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목표에만 반응한다.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다음 수를 읽지 못한다.
위협에 대비하는 인간의 자세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이길 수 없는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인간들이 서로의 미약한 힘을 모아 저항할 것인가, 나약한 인간들 중 보다 더 나약한 인간들을 제물로 삼아 위협에 굴종하며, 타협할 것인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
많은 이들의 안위를 위해 약한 자를 제물로 삼을 것인가(어차피 무리 중에 약한 놈은 비용을 발생시킨다), 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속되어 온 위협에 맞서 싸울 것인가? 옛부터 내려온 전래 동화를 봐도 작은 마을에 위협이 되는 사나운 짐승 혹은 괴수가 등장을 하면 마을의 대표들은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처녀와 아이 등 가장 보호 받아야 할 약한 인물들을 제물로 삼아 위협과 타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굴종과 타협만이 살길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누구라도 지속된 위협을 없애야한다는 주장을 할 경우에 그 사람은 다음 제물이 되곤한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은 그의 입을 막거나 그를 숨기거나 그를 가둬버리는 또 다른 위협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그렇게 오랜 세월 굴종의 삶을 살던 그들에게 새로운 외부 세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마을 사람들을 긍휼이 여겨 초인적인 용기와 능력을 발휘해 괴수를 처단한다.
자,..... 그 이후가 궁금한가?
지속적인 위협이 사라지고 나면 마을의 대표의 의견에 반대를 했던 또 다른 세력이 마을의 안위를 위해 마을 사라람들을 희생 시켰던 무리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질서를 잡아야 맞지만 대부분의 전래 동화의 끝은 초인적인 존재는(대개는 신분이 높은 남자인 경우가 많다) 괴수를 없앤 보상으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상으로 받게 되고 그 마을을 다스리기도 한다. 절대로 이 마을에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등의 혁명을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개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평화로운 끝은 맞이하게 된다.
인간이란 힘에 굴종하며, 나보다 나약한 인간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안위를 보존받는 존재이며, 불의에 항거하며 싸우는 인간은 보통 인간이 아닌 초인적인 존재인가?
도대체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사건의 발달, 공포의 대상을 좀비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영화의 원천적인 공포의 대상은 좀비 따위가 아니다. 좀비는 그저 소품에 불과하다. 가장 공포스러운 대상은 배우 김의성이 연기하고 있는 인간 1이다. 공포에 질려서 눈이 멀어버린 인간 1이다.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영화 속에서 이기적인 인간은 이미 공유와 마동석이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감독은 인간의 갖고 있는 원초적이고 극악한 이기심을 보여주고 있다. 좀비는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촉매의 역할 밖에 하지 않는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이의 희생따위는 안위에 두지 않는 심지어 서슴없이 다른 이를 제물로 던져버리는 존재들이 과연 인간의 민낯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장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영화로 만들어진 사회의 모습에 분개할 필요도 없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유가족의 치료 동의가 없어 병사했다고 주장하는 전문의나 경찰의 물대포가 원인이 아닌 신원불명의 '빨간 우비 사나이'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 지도자들의 모습은 제 안위를 위해 처녀와 아이를 제물로 삼는 동화 속 인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 속 김의성 역시 그렇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안녕이다. 피범벅이 되어 좀비와 싸워 가까스로 도망쳐 온 생존자들은 사지에서 살아 온 같은 인간이 아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을지도 모를 위험 존재일 뿐이다.
김의성이 분한 인물이 특별히 악한 인간이기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공유가 연기했던 석우를 보자. 그 역시 이타적이며 초인적인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그의 모습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에게는 나와 딸 밖에 없다. 딸은 내가 확장된 모습이다. 그는 좀비가 출연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기차 안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한 딸에게 "지금은 양보할 필요없어."라고 말하고, 군부대가 배치돼 1차 안전 지역으로 확인 된 대전에서는 외부 연락책에게 은밀히 전해 들은 정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우리가 '인간미'라고 말하는 '초인적인 착한 마음'을 가진 딸과 임산부 성경, 그의 남편 상화, 야구부 학생 영국 등과 함께 하며 좀비 무리와 대적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 따위는 없다. 다만 내가 지켜야 하는 내가 확장된 대상을 위해 싸운다는 점이다. 가족 혹은 친구. 누군가 절실히 지켜야 하는 대상이 있는 사람들 석우, 상화, 영국 이들이 좀비 무리와 싸우는 이유는 내가 확장된 대상을 위해서이다. 만일 그들이 그 기차에 혼자 타고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두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김의성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처입은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하는 모습은 공포에 질린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좀비가 된 그의 모습은 오히려 낯설지 않았다. 무조건적으로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좀비의 모습은 제 한 몸의 안녕을 위해 사지에서 도망쳐 온 생존자들을 좀비 떼의 구덩이로 몰아 넣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쯤되면 좀비와 인간의 차이가 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매우 고전적인 결말을 맺는다. 인간의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 곳곳에서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두 인물(게다가 이 인물들은 여자 어린이와 임산부로 고전적으로 어린이와 임산부는 미래에 대한 비유로 많이 쓰인다.)은 그들을 위해 싸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살아남는다.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희망인가 싶은 이 결말은 아주 진부하지만 이미 감독은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진부한 결말에 대해서는 그닥 시선을 두고 싶진 않다. 설마 더욱 진부한 생각으로 결말을 착한 사람은 살아남는다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말하고 싶진 않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최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우 슬프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다. 사실 인간은 좀비와 다를 게 없다. 눈앞의 이익과 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 남의 중병보다 나의 고뿔이 더 중하다는 말은 아주아주 인간적인 면에 대한 동의라고 본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다. 나를 지킬 특성화 된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 피부는 얇고, 뿔도 없고, 털도 없고, 몸집도 작다. 그러니 가장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할 줄 안다. 그러나 이것도 양면의 칼이 되어 내가 살기 위한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교육을 한다. 인간성에 대해, 이웃에 대해, 사랑에 대해, 측은지심에 대해, 행복에 대해 교육을 한다.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운용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든다. 모두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말이다. 끊임없이 교육을 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적 시스템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벌을 주며 교육을 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들은 영웅으로 추대해 그들의 행적이 곧 인간적임을 또 교육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렇게 해야 인간적이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요구받는다.
"왜?"
왜냐고 묻고 있다. 영화 부산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