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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Oct 30. 2016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춘몽.

오랜만에 본 용감하게 불친절한 영화다. 영화는 서사와 인과가 전혀 일치하지 않은 채로 전개 된다. 주조연이 따로 없이 단편적인 사건들만 모자이크처럼 어지럽게 배치되었을 뿐이다. 줄곧 회색빛이었던 화면이 영화 엔딩 때가 되어서야 컬러가 되는 것. 이것이 그나마 조금 볼 수 있었던 친절이었다. 색이 들어가면서 영화는 전과 다른 새로운 사건이 전환되었음을 공표한다.


영화의 처음부터 나른한 봄에 까무룩 든 잠에 달게 꾸고 난 꿈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는 듯한 장치들을 찾아볼 수 있다. 봄이라는 계절이 얼마나 잔인한가? 기대하게 하고,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리기가 일쑤인 계절이 봄이다. 북풍한설에 지쳐 있을 때 따뜻해 보이는 여린 볕을 한 줄기 보여주지만 그 볕을 느끼기도 전에 아직 물러나지 않은 찬 바람의 기세를 먼저 마주치게 한다. 어린 순들에는 언 땅에서, 딱딱한 나무 껍질을 이기고 나오도록 명령하는 계절이 봄이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은 아직은 물러나지 않은 겨울의 칼바람을 품고 있어 성질급한 봄꽃들에게 시련을 주기도 하니 봄만큼 잔인한 계절도 없다.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내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현실과 마주하게 하는 변덕. 오죽하면 봄을 이야기할 때 '꽃샘'이라는 수식어를 두었을까 싶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꿈을 꾼다. 완전한 숙면을 취하기 전 혹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기 전 잠과 현실의 그 어중간한 어느 지점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있을 때 꿈은 꿈 같지 않다. 꿈은 꿈 속에서는 그처럼 완벽한 현실이 없을 정도로 완변한 하나의 세계이다. 꿈의 불완전성과 꿈의 비현실성을 깨닫게 되는 때는 그것에서 벗어난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는 꿈을 꾸었나 보다. 부당하게 빼앗긴 자기 자리를 되찾아 원래 자기 것이었음을 공고히 하려는 꿈을 꾸었나 보다. 미숙한 자아의 티끌하나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꿈이 냉정한 현실에서 어떤 방법으로 실현될 지 몰랐던 시간 동안 고독한 은둔의 세월을 보냈고, 숨겨진 수줍은 꿈이 단지 꿈이 아닌 잠에서 깨어나도 깨지지 않는 공고한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선의'에 의해 그녀는 18년 동안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현실의 꿈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가 보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는 어지러운 시간이 반복되면서 현실과 꿈을 오가며 어떤 것이 꿈인지, 어떤 것이 현실인지 판단이 힘들었던 그녀에게 어떤 의미에서의 '선의'가 어떤 의미에서의 '정의'에 의해 슬슬 금이 가고 있다.

그녀는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으려면 완전한 각성 상태에 들어와야 한다.

회색빛 영상이 총천연색의 다양한 색깔로 전환되는 시점에 들어와야 한다.

영화 속 예리의 죽음은 현실인가, 꿈인가? 영화 속 예리 아버지의 깊은 잠은 꿈인가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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