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의 영화라고 하면 어딘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세상에 저런 지질이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못나디 못난 철 안 든 츤데레들을 죄다 모아 놓은 것 같은 그가 보여주는 세상을 보면서 겉으로는 미처 참아내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풋!하고 터트리지만 사실 속으로는 뜨끔뜨끔한 뭔가가 있었단 말이다. 마치 다 크고 난 후 어릴 적 감정대로 갈겨 쓴 너무나도 거침없이 솔직한 일기장을 보고난 후의 기분이랄까?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불편했다. 내 속에 있지만 감히 나 조차도 보기 힘든 지질함을 마치 나는 아닌 척, 나는 저들과는 다른 척하고 보고 있는 나를 나 스스로 불편하게 했다. 물론 그러면서 나름의 자위도 이루어진다. 나는 나의 역린을 대담하게 들여다 보고 고백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란 말이다. 하는 그런 자위. 그런 불편함과 그런 자위를 일으키는 것이 홍상수의 영화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홍상수는 친절해지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옥희의 영화'에서 부터였다.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홍상수의 시선은 시점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의 홍상수의 시점은 현재 진행중이었던 반면 '옥희의 영화'에서는 현재 완료의 시점이 꽤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시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분히 정서적인 시간을 이야기 한다. 그 전 영화에서는 '지금 나는 이런데 니가 어쩔래? 지금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간절하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였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가 풀어내는 사건의 시점은 '그때 나는 이랬어. 그때는 이것처럼 간절한 것이 없었어. 그때는 너도 아마 그랬을거야.' 하는 식으로 관객의 동의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가 그의 영화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지질한 캐릭터들을 단순한 지질함이 아닌 연민을 자아내는 느낌이 더 강해졌고, 애써 그들의 편에 서서 이해해 주고 싶어지는 그런 포지션을 갖게 되었다. 물론 영화라는 것이(영화 뿐 아닌 모든 예술의 교감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급자의 입장이 바뀌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동안 나도 나이를 먹었고, 그리고 그의 영화를 봐 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언어에 익숙해져 버렸을 수도 있다. 또한 감독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에 시선이 전보다 유순해졌을 수도 있고, 시쳇말로 투쟁에 대한 기운이 빠졌을 수도 있다.
올해 그를 뜨겁게 했던 증거로도 자주 오르내렸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경우는 너무 유순해져서 흐물흐물해 보이기까지 하다. 과거의 홍상수였다면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함춘수(정재영)이 아니라 안성국(유준상)이어야 했다. 조금 더 뻔뻔스러워야 했고, 지금 이것 아니면 아무것도 없어!하는 식의 진상을 피워야 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아니라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고 진상을 부리며 설득 되지 않을 논리를 피워야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홍상수는 말한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홍상수는 황희가 되었다. "너도 맞고, 또 너도 맞다." 아, 이렇게 친절하다 못해 착해 빠진 홍상수라니...... 솔직히 내게 이런 홍상수는 매력 없다.
이 영화 속의 모든 남자들은 너무나도 착하다. 예전에 홍상수 같으면 맑은 얼굴을 하고 "저 민정이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끝까지 "너 민정이 맞잖아!"하면서 떼를 쓰고, 뒹굴고, 난리를 피우다가 혼자 지쳐서 만신창이가 된 꼴로 "알았어, 민정이 아니야." 했다가 다시 한 번 시도했을 것이다. "너 민정이 맞잖아!!" 그리고 그녀가 민정이가 맞다는 것을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홍상수의 남자들은 너무나도 친절하게도 그녀의 주장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을 갈구한다. 마치 육포를 들고 있는 주인에게 애원하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녀에게 무릎 꿇지 않으면 그는 그야말로 폭망하고 만다. 인생의 중심에 있는 그녀에게 반기를 들면 그는 무능한 생명체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영수(김주혁)은 감히 그녀에게 대항했다가 바보가 되었다. 물론 영수의 결론은 나의 존재는 오로지 너(민정)로 인해 규정될 수 있는 존재로 재탄생된 삶이 되었다. 더 이상 외부와 맞서는 또라이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논리로 거대한 세상과 맞서는 돈키호테는 홍상수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다.
홍상수의 영화에 나오는 진상 남자들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마도 그런 피곤한 캐릭터의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세상을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홍상수가 현재 만들어 내는 캐릭터들이 훨씬 효율적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똥고집 피우듯이 자기 주장만 해대는, 결국에는 조금 더 성숙한 여자의 이해를 바라는 캐릭터는 피곤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영화 속에서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똥고집 피우는 진상 캐릭터가 사라져 버린 것이 뭔가 심히 아쉽다.
의외의 순간에 뜨끔하게 찾아 오는 눈을 질끔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나를 만나는 스릴이 사라져버려서 그런 걸까? 너무나 성숙해져버려 이제는 더 이상의 신선함과 의외성은 찾을 수 없고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이 쓴 자기 개발서를 읽는 것 같은 진부함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나는 철 든 홍상수의 언어는 별로다. 재미가 없다. 김이 샌다.
민정이가 아닌 민정이에게 애정을 구하는 늙은 남자들의 오글거리는 멘트들이 주는 단편적인 모습들에서나 옛적의 향수들을 자극하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그저 매우 단편적인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전처럼 그런 오글거리는 것들이 주는 블랙 코미디는 더 이상 없다. 그들은 그저 낯선 여자가 주는 신선한 자극에 굴복한, 시들시들하게나마 살아 있는 수컷의 본능 그 외에는 없다. 유치한 패기, 단순할 정도로 순수한 절박함, 쪽팔릴 정도의 진지함 따위는 없다. 힘이 빠져버렸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독하게도 마초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홍상수의 세계가 한 발 더 나아가 상대와 공존하고 다른 세계와 교류하려하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지금은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그의 언어적 변화를 내가 낯설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격렬함 대신 얻게 되는 안정감. 나를 주장하기를 조금 늦추고 상대가 원하는 시선으로 시점을 조금 옮겨가면 평화롭다. 어른스럽고, 젠틀하고, 우아해 보인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바랐던 것이 평화로움과 어른스러움과 젠틀함과 우아함이었던가?
지금 그는 자기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은 듯 하다.
그러나 그가 변하고 있는 듯한 그의 세상을 그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비록 지금은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영수의 주변에서 영수의 시선으로 계속해서 영수를 보고 있는 동네 친구들이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혹자는 사랑을 깨달은 남자의 자기 고백 같은 영화라는 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예술가들에게 바라는 바는 이러하다. 현실은 내가 살 테니 당신들은 현실에 물들지 않은 당신들의 퓨어한 이상을 계속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