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어둠이 내린다’
지난 시간을 정리해보니 5월에 감상한 흑백 버전의 기생충이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감상한 영화이다. 이토록 오랜 기간 극장을 가지 않았던 적이 아마 없었지 싶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고,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혼돈임을 증명하는 일처럼 여겨진다. 무려 4개월 만에 극장으로 발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테넷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이들의 기대감을 잔뜩 산 작품 테넷은 직접 그 뚜껑을 열어보니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이지만 동시에 아쉬움도 여럿 따라오는 영화로 느껴진다. 시간의 순서가 뒤섞이는 설정,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설정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 놀란감독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보여주는데 앞으로의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예측하기가 어렵게 하지만 몰입도 있게 풀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이 내게 아쉽게 느껴지는 가장 큰 까닭은 빌런의 존재감이다. 배트맨 트릴로지에서 조커나 베인 같은 캐릭터를 뽑아낸 놀란이 그려내는 빌런이기에 더 아쉽게 느껴진다. 소재에 비해 조금 평면적으로 다가오는 플롯과 그보다 조금 더 밋밋하게 보여지는 ‘사토르’ 라는 캐릭터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생각의 회로를 충분히 활용하며 봐야 하는 작품이기에 사토르가 주가 되어 스크린을 채우는 장면 장면은 때로는 지루하게 다가와 회로의 사고가 멈추는 기분이 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라는 대사를 여러 번 곱씹게 된다. 이 말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결국 과거, 현재, 미래는 평행세계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매 순간 우리는 과거의 일을 현재 말하고 있지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또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 그 안에서 시간의 유효성은 중요하지 않다. 또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적극적으로 사용, 활용하여 우리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버전이라는 영화 속 장치를 활용해 연출해낸 액션신은 정말이지 경이롭다. ‘아니 저게 어떻게?’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맨손 격투신과 동시에 조금 오버해서 한스 짐머의 부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음악감독 ‘루드비그 예란손’ 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사운드까지, 이 작품 역시 아이맥스 관람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꼭 말하고 싶다. 동시에 대부분의 놀란의 작품이 그러했듯 이번 작품 ‘테넷’ 에서도 역시 가족애, 그 사랑의 본질을 관통해내는 주제의식 없이 놓치지 않았는데 이 따뜻한 메시지를 매번 전달하려는 예술가의 작품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10초, 10분. 숫자 ‘TEN’ 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대사들과 바로 적어도, 거꾸로 적어도 ‘TENET’ 인 작품의 제목까지. 놀란은 본인이 그려내고 생각하는 복잡하고 동시에 경이로운 세상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내는 예술가 중 하나이다. 매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고 동시에 기대되는 이유이다.
그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도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