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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Sep 22. 2021

올드보이

‘명심해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에요’


얼마 전 감상한 코리안 심포니의 공연 ‘코리안심포니와 만나는 영화음악 그대로  공연의 메인 테마는 영화음악이었다. 유명하고 대중적인 레퍼토리의 곡들 ,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으로 들려온 영화 올드보이의 음악들. 지휘자의 말마따나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는 신선한 경험을 새롭게 즐길  있었던 시간 속에서 앞서 말한 영화 올드보이의 음악을 듣고서  영화를 다시 돌려보지 않는 일은 어떤 죄악처럼 느껴졌다. 죄를 짓고   없어 정말이지 오랜만에 장면 하나하나를 넘기지 않고 고스란히 눈에 담아낸 박찬욱 감독의 2003년도 작품, 올드보이.


올드보이는 복수극이다. 적어도 내가 살면서 경험한 복수 중에서   이우진이 오대수를 향해 행한 복수만큼 가장 치밀한 그리고 가장 잔인한 동시에 가장 허탈한 복수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결국 모든 복수의 끝이 그러하듯, 이토록 치밀하고  꾸며진 복수의 끝도 허탈로 막을 내린다. 기대하는 행복은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는 소리다.  복수의 시간이  본인을 살게 했음을 깨닫고 나면 과연 남는  무엇인가. 웃을 수도,  수도 없는 존재만 덩그러니 비춰지는 장면.  대목에서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 마지막 시퀀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극의 서스펜스가 뚜렷한  작품은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선의 결이 극도로 선명한 작품처럼 보여진다.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말이 상대방에게  닿아 비로소 짙고 강하게 새겨지는 지를 감독은 정확히 알고 있다. 자극적인 소재와 비현실적인 스토리라인 속에서 납득이 되고 수긍이 가는 연출을 보여주는 능력이 가히 독보적이다. 박찬욱은 그런 감독이다.


시작부터 그리고 내용이 점차 흐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질문을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만들지만, 하나하나  질문의 답안지를 펼쳐 보이면서  전체의 짜임새를 탄탄하게 잡고 가는  구성은 정말이지 예술  자체다. 혹시  영화를 예술분야에 묶어서 분류를 해야 하는지를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보여줘야  정답 같은 작품이 바로  ‘올드보이라고 생각을 한다.

 영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나면 삶에서 ‘, 무슨  정도 가지고 그래라는 어떤  문장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말이라는 것의 무게를 가늠해야 한다면 과연 그건 뱉는 이의 몫일까, 듣는 이의 몫일까. 고작 모래알처럼 가벼워 보이는  말도, 무려 바위처럼 무거 워보이는  말도 지극히 나의 편에만 서서 뱉거나 흘려듣지 않았는가를  작품은 돌아보게 만든다. 말이 지닌 무게의 정도를 내가 가늠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 ,  어떤 경우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말로는  쉬운데, 삶의 모든 순간에  공식이  적용되지 않아 더욱 어렵게만 다가온다. 도대체 왜일까.


그냥 잊어버린 거다.

왜?

남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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