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성 Jun 17. 2020

#1. 준비할 수 없는 일


"할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셨어…"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엄마가 건넨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담담하게 할머니의 암 발병 소식을 알렸지만, 남아메리카와 한국을 잇는 가냘픈 인터넷 통화 회선만큼이나 불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어져 들리는 소식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신 까닭에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고, 앞으로 길어야 6개월 정도의 삶이 남으셨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 그러니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준비한다고 되는 일이던가. 영원한 헤어짐을 대비한 마음의 준비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일일까. 설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나보다 엄마에게 더욱 필요한 일일 것이다. 엄마를 잃는다는 일은 누구라도 예습한 적 없는 일일 테니까.


어떠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은 통화를 이어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적잖이 당황스러웠고, 할머니와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암으로 인한 고통으로 힘들어하실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슬프기도, 두렵기도, 허망하게도 들이닥치는 감정들을 부여잡고는, 엄마에게 되지도 않는 위로를 내밀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엄마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주변머리라고는 없는 자식이니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어색하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에는 더욱 서툰 사람이니까. 아마도 목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며 겨우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참 못난 딸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엄마를 대신해 나를 돌봐주셨다. 생계를 꾸리기에 바빴던 아빠와 엄마는 평일이면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나를 맡기고는 주말이 돼서야 찾아왔다. 할머니는 첫 손주였던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다. 농사일하랴 집안일하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애지중지 손녀를 먹이고 키웠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은 손녀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장에라도 날아가 긴 여행에서 손녀가 돌아왔다며 와락 안기고 싶었다. 물리적 거리가 먼 만큼,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그럴수록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력한 손녀라는 사실이 피부로 다가왔다. 하필 끝없이 넓은 태평양을 건너, 지구 반대편의, 거대한 대륙의, 광활한 아르헨티나를 여행 중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반년 이상의 여행이 남은 시점이었다.


한참이나 망연자실한 상태로 침대 안에 갇혀 시간을 보내다가, 하나 둘 잊고 지냈던 할머니와의 추억들을 곱씹어댔다. 할머니와 함께 저장된 유년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을 보는 느낌이 났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엄마의 자장가를 통해서, 삼촌의 놀림을 통해서 매번 같은 레퍼토리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았다. 수없이 읽어서 낡을 대로 낡고 손때가 잔뜩 묻어 있지만, 천둥이 치거나  무서운 영화를 봐서 잠들기 어려운 밤에 옆구리에 끼고 눈을 감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륵 잠들게 해주는 그런 동화책... 책장을 넘기듯 할머니와의 추억을 한 장 한 장 떠올리다 끝 장에 달했다. 마지막 페이지는 엄마였다. 불현듯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엄마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위로가 가장 필요할 사람, 엄마에게 닿기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엄마를 잃는다는 일, 상상조차 되지 않은 슬픔을 우리 엄마가 겪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나밖에 없는 딸 앞에서 자신의 유일한 엄마를 머지않아 잃게 된다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은 척 토로하는 엄마 옆에 나는 없었다. 80세에도 정정하신 할머니가 암 판정을 받으신 것은 큰 충격이었지만, 뒤이어 나를 덮친 것은 할머니가 엄마의 곁을 떠나듯, 언젠가는 엄마도 내 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쯤이었을까. 엄마에 대한 마음이 유독 짙어졌던 때가...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그리움과 미안함이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