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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Sep 02. 2020

#3.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마지막이란 단어를 붙이면 유독 특별해지는 것들이 있다. 특히 그 마지막이 삶과 죽음의 엇갈림 전의 마지막이라면, 마지막이 갖는 의미는 한없이 구슬퍼진다. 마지막이라 예상하지 못하고 했던 행동들이 누군가와 했던 기억의 마지막이라면, 후련 보다는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그 여행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할머니 입속에 망고를 더 넣어 드렸을 텐데... 할머니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눴을 텐데... 할머니 손을 한 번이라도 더 따뜻하게 잡아 드렸을 텐데...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 한가락 뽑아 드렸을 텐데... 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드렸을 텐데... 할머니와 처음 떠났던 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80세를 넘기신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할머니의 첫 해외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비극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온통 희극으로 가득 찬 시간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봐서 좋았고, 할머니 냄새를 맡아서 정겨웠고, 할머니께 작은 효도라도 하게 된 것 같아 그저 다행이다 싶었다. 그게 다였다. 받은 사랑에 비해 한없이 미천한 효도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할머니와 이곳저곳 돌아다녀야지 마음먹었던 나는, 끝내 그 다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야만 했다.  

   

실은 할머니와의 가족 여행에 참석하는 것을 망설였다. 할머니의 팔순을 맞아 외가 쪽 가족들이 모두 모여 방콕으로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20명이 넘은 가족이 함께 가는 패키지 일정이었다. 가족 여행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와 남편은 유럽에 있었다. 게다가 모로코를 시작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이어지는 아프리카 대륙 여행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결제한 직후였다. 아프리카에서 방콕으로 넘어가는 항공편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발 방콕행 티켓에 비해 2~3배는 족히 비싼 금액이었다. 가족 여행이 끝나고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비용과 시간 면에서 큰 낭비였다. 가족 여행에 합류하는 것은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하필 방콕은 이미 여러 차례 다녀온 여행지라 인도양을 건너갈 만큼 끌리는 곳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비효율이라는 판단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세계를 여행하겠다며 직장까지 그만두고 남편과 떠나온 마당에, 할머니 팔순을 기념해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에 빠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나와 남편은 방콕으로 떠났다. 일정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평범한 패키지여행이었다.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는 여행이 시시했다. 심드렁한 나에 비해 가족들은 한껏 즐거워했다. 특히 할머니는 태어나서 처음 나온 해외여행인 만큼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아이 마냥 웃고 또 웃으셨다.  


정해진 일정 외에도, 추가로 태국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할머니를 담당하는 마사지사에게는 할머니께서 무릎이 좋지 않으시니 살살해달라고 일러두었다. 가족 모두가 나란히 누워 수다를 떨며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를 받아 나른해지는 와중에도 엄마는 계속 할머니 무릎을 챙겼다. 마사지가 끝날 때쯤 모두가 날짝지근해졌다. 할머니도, 엄마도, 나도, 가족들도 발갛게 볼이 물들었다.     


기분 좋게 나른해진 우리는 다 같이 모여 시원한 맥주도 마셨다. 할머니는 술을 드시지 않는 대신 태국의 열대 과일들을 드시며 달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특히 망고가 맛나다고 하셨다. 샛노란 과육이 달콤하면서도 입 안에서는 부드럽게 퍼져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드시기에 편했나 보다. 망고 껍질을 예쁘게 벗겨 할머니에게 건네면 할머니는 쏙 하고 과육을 빨아 드셨다. 그 모습은 아기 같았다. 할머니는 현지 음식도 곧잘 드셨다. 처음 드시는 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뭐든 참 잘 드셨다.


즐거워하는 할머니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방콕에 오길 참 잘했다고. 이것저것 머리로 따지며 고민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때의 부끄러움은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죄송함이 되어 고스란히 돌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할머니와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비록 마지막이 되었지만, 한 번이라도 할머니를 바깥세상에서 만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할머니의 췌장암 진단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영원한 작별을 해야 했다. 그제야 그때의 나를 방콕으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더 이상의 후회는 만들지 말라고. 누군가를 잃고 나서야 뼈저리게 겪는 그 후회를 다시는 만들지 말라고. 동생을 보내고 난 후 매일같이 겪었던 회한의 나날들이 나를 본능적으로 그곳에 가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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