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OTT시대, 영상 콘텐츠 제작의 변화 #신문과방송(2024.12)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월간 <신문과방송>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카이빙을 위해 브런치에도 업로드 합니다. 게재된 글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흑백요리사’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부문 1위, 펀덱스 TV-OTT 통합 비드라마 화제성 6주 연속 1위 등의 성과는 ‘흑백요리사’가 만들어낸 효과를 겨우 일부만 보여줄 뿐이다. 여전히 연계 상품들이 높은 인기를 끌고 있고, 다시 요리 예능의 바람을 불러오는 등 다양한 파급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 OTT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의 시도가 이어졌던 ‘K-예능’에서 나온 큰 성과라는 점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40명이 동시에 요리하는 장면이 주는 압도감은 높은 규모의 제작비는 물론 제작 과정의 높은 난이도를 상상하게 한다.‘흑백요리사’와 같은 콘텐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조건에서 제작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기존의 한국 방송사는 과연 이러한 콘텐츠 제작을 해낼 수 있을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흑백요리사’ 사례를 통해 OTT 시대의 한국 영상 콘텐츠 제작 환경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작진 인터뷰를 통해 본 흑백요리사의 제작 환경
‘흑백요리사’의 제작 과정에 대한 정보는 주로 제작진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공간과 세트에서 출발해보자. ‘흑백요리사’ 1화는 40인이 동시에 조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1,000평 규모의 대규모 세트를 꾸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40명의 셰프가 동시에 조리하기 위한 물과 가스,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세트 제작에만 1달이 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당 세트는 유진그룹에서 운영하는 파주에 위치한 대형 멀티 스튜디오 단지를 활용한 것으로, 지난 해 11월에 준공됐다.
100명의 요리사, 거기에 백종원 대표를 섭외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김학민PD는 ‘넷플릭스를 등에 업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콘텐츠를 동시에 유통할 수 있는 플랫폼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제작비 규모 역시 글로벌 OTT의 중요한 ‘힘’의 요소임은 분명하다. 모은설 작가는 지금까지 본인이 참여한 예능 프로그램 중 가장 많은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되었으며, 출연자를 제외하고도 300명이 넘는 스태프가 참여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학민PD는 제작비에 대해서, 넷플릭스는 막연하게 막대한 비용을 주는 것이 아닌, 합리적 이유가 있는 ‘규모’의 제작비, 즉 ‘구현하는 만큼의 제작비’를 투자한다라고 이야기 한다.
기획과 관련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먼저 제작진은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 철저히 국내 시청자를 먼저 고려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글로벌 시청자들에게 인종 갈등의 요소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영문 제목을 이를 고려해서 조정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김학민PD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해서 시각이 좀 트인 기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이란 구체적인 지역의 시청자를 타깃으로 제작하면서도, 동시에 글로벌 시청자를 고려한 조율을 제작 과정에서 진행하는 것은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이란 관점에서, ‘흑백요리사’를 제작한 김학민 PD가 이전에 ‘테이크 원’이란 넷플릭스 예능을 이미 제작해본 경험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테이크 원’의 실패를 통해 ‘덜어내기’의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이미 한국의 제작진들 중 글로벌 OTT 타깃의 예능 콘텐츠를 제작해본 인력이 누적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OTT 시대, 달라진 제작의 조건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흑백요리사’는 막대한 제작비의 투자와 더불어 이러한 제작비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콘텐츠에 대한 기획력과 상상력, 그리고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제작의 인적, 물적 기반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글로벌 OTT의 지속적인 제작 투자는 대규모 예능 콘텐츠의 제작 경험을 가진 인력의 축적으로 이어졌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 등 인프라의 확충도 이루어졌다. 구현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비용의 부담 없는 창작이 가능하다는 점은 창작자의 기획이 기존 방송의 틀을 벗어나는 기회로 작용했다. 글로벌 시장을 고려한 포맷으로 만들고 해외 시청자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재미의 준거는 한국이 되어야 한다는 기획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분명 글로벌과 로컬을 함께 고민해야하는 글로벌 OTT 유통을 전제로 할 때 적용가능한 것들이다. 이제 창작자들은 플랫폼의 특성을 고려한 기획을 진행한다. 제작 규모는 글로벌 플랫폼의 기대 수준에 맞게 높인다. 글로벌 제작의 주요 기준들을 학습하고, 이들의 마케팅을 활용한다. 출연과 셋트 운영 등에서도 ‘안전’과 같은 요소들을 고려해서 보다 세밀한 절차를 숙지하고 지킨다. 후반작업 기간, 세트를 구성하는 기간 등 더 오랜 시간의 사전 제작의 과정을 진행한다. 글로벌 참가자를 초대하고, 참가자와 비밀유지 등 철저한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세부적인 제작 조건의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스튜디오 등 인프라 역시 이러한 글로벌 콘텐츠 제작을 고려한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존의 한국 방송사에서의 제작과정에 이러한 조건을 적용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단지 비용의 문제만은 아니다. 콘텐츠 제작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고려해야할 조건 역시 다르다. 더구나 제작진 이탈이 이어지는 등 기존의 창작 기반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창작자는 더 큰 성장과 경험, 보상의 기회를 찾아 이동한다. ‘흑백요리사’를 제작한 스튜디오 슬램은 SLL의 레이블로서 기존의 리니어 채널 중심의 접근을 벗어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곳이다. 기존의 방송사 외부에, 글로벌 유통을 전제한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재구성되고 있다. ‘흑백요리사'은 이러한 이동과 재구성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계를 인식하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과거 ‘오징어게임’이 나왔을 때, “KBS는 왜 오징어게임을 못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국감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런 질문은 여러가지 고민을 환기시킨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현재의 지상파 방송의 구조로는 이런 정도의 작품을 제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노동렬 교수는 이에 대해 “위기가 아니라 한계"라고 지적한다. 이미 한국의 방송영상 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편입된 상황에서, 자금의 문제들은 단기적인 노력으로 해결가능한 일시적인 문제란 의미의 위기가 아니란 말이다. 명백하게 현재 한국의 영상 콘텐츠 제작 부문은 글로벌 타겟의 작품과 내수 타겟의 작품으로 이중화 되고 있다. ‘흑백요리사’의 성공은 글로벌 타겟의 작품에 걸맞는 충분한 제작 역량과 경쟁력을 우리가 갖추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반면, 내수 타겟의 콘텐츠 제작은 투입 가능한 자원과 비즈니스 전략의 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문제는 이 간극 사이에서 제작 생태계의 구조 변화가 나타나는 가운데, 기존의 취약성이 내수 제작 기반의 어려움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계’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해준다. 한계는 현재 단계에서 명확한 문제의 지점이면서, 동시에 극복이 가능한 대상이기도 하다. 다만,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명확한 전략과 고된 준비가 필요하다. 창작의 다양성을 위해 내수 타겟의 콘텐츠 제작 기반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글로벌 타겟의 제작 경험과 관련 인프라의 변화를 어떻게 지금의 한계를 넘어설 기회로 삼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