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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승 Jan 26. 2024

키키의 작은 씨앗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안내서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글.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와 불안정한 대인관계가 특징인 경계성 인격장애.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생소한 진단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알고 보면 상처와 고통 속에서 아파하며 인정과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인격장애라는 이름이 편견을 갖게 하는 색안경이 아니라 뿌연 안개를 날려버리는 시원한 바람이 되어 차별과 낙인 없이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에서는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한 후 이어서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란?


인격은 그 사람의 고유한 사고, 감정, 행동 양식을 말합니다. 성격, 가치관, 태도, 습관, 믿음 등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며,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형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회와 문화에서 납득하고 용납할 만한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방식, 감정 상태, 행동 패턴을 지속해서 나타내고 관계, 직업, 사회 또는 기타 중요한 부분에서 오랫동안 심각한 문제를 겪을 때 인격장애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경계성 인격장애는 하늘과 지하를 오가는 기분처럼 조절하기 매우 어려운 정서적 불안정, 상대를 천사라고 찬양했다가 악마라고 비난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오가는 격렬한 대인관계, 떠나가는 사람을 자살 시도와 자해를 해서라도 붙들려하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처절한 노력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하고 어려운 질환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


정신건강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장애 진단통계 편람(DSM-V)에 따른 경계성 인격장애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계성 인격장애 DSM-V 진단기준:

대인관계, 자아상 및 정동의 불안정성과 현저한 충동성의 광범위한 형태로 성인기 초기에 시작되며 여러 상황에서 나타나고, 다음 중 5가지(또는   그 이상)를 충족한다.

1. 실제 혹은 상상 속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함(주의점: 5번 진단기준에 있는 자살 행동이나 자해 행동은 포함하지   않음)

2. 과대이상화와 과소평가의 극단 사이를 반복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불안정하고   격렬한 대인관계의 양상

3. 정체성 장애: 자기 이미지 또는   자신에 대한 느낌의 현저하고 지속적인 불안정성

4. 자신을 손상할 가능성이 있는 최소한 2가지   이상의 경우에서의 충동성(예 소비, 물질 남용, 좀도둑질, 부주의한 운전, 과식   등) (주의점: 5번 진단기준에 있는 자살 행동이나 자해   행동은 포함하지 않음)

5. 반복적 자살 행동, 제스처, 위협 혹은 자해 행동

6. 현저한 기분의 반응성으로 인한 정동의 불안정(예: 강렬한 삽화적 불쾌감, 과민성 또는 불안이 보통 수 시간 동안 지속되며 아주 드물게 수일간 지속됨)

7. 만성적인 공허감

8. 부적절하고 심하게 화를 내거나 화를 조절하지 못함(예: 자주 울화통을 터뜨리거나,   늘 화를 내거나, 자주 신체적 싸움을 함)

9. 일시적이고 스트레스와 연관된 피해적 사고 혹은 심한 해리 증상


진단기준을 읽어보면 ‘어? 나(혹은 그)도 이런 경향이 있는데, 경계성 인격장애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정신장애 진단을 찾아서 읽어보면 다 나 또는 주위 사람들 이야기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소수만의 특수하고 유별난 문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따라서 진단을 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만나서 충분한 상담과 진료를 받으며, 자신이 살아온 삶과 겪고 있는 어려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해리장애, 알코올이나 마약 등 물질사용장애, 양극성장애 등을 함께 갖고 있거나 이런 질병과 잘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


경계성 인격장애를 진단한 후에는 고통스러운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심리치료를 받을 수도 있으며, 두 가지를 병행할 수도 있습니다. 심리치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ialectical behavior therapy, DBT)는 처음에 중증의 자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되어 이후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우에 적용되어 주목받고 있습니다. 어떤 치료 기법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참여이며, 치료자의 전문성과 공감, 서로의 협력이 든든한 밑바탕이 됩니다.


우리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보이는 격렬한 감정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때문에 큰 혼란과 고통을 겪습니다.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경계를 설정하고, 자기 자신의 감정과 안전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소진되어 버립니다.



공감과 인정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저에게 이 작품은 큰 감동을 줍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주인공에게 몰입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고통, 갈등, 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규범을 앞세운 사회와 직장에서 종종 편견과 낙인을 받곤 합니다. 우리가 왜 그런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해야 할까요? 경계성 인격을 갖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유전적인 소인, 자라면서 겪게 된 여러 가지 사건과 트라우마, 부모의 양육 등 모든 경험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듭니다. 성장 과정을 통해 힘든 인격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어른이 되어 그 인격을 가지고 살아야 할 책임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초래하는 인격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지만, 무조건 무시하고 폄하해서도 안 됩니다. 과거에는 소외당한 사람들이 생존할 권리를 애원했다면, 이제는 존재할 권리를 갈망합니다. 인정은 존재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공감은 그 자리에 온기를 가져옵니다.


사실 누구도 완벽한 정상인은 없습니다. 유명인에게 쏟아지는 열광과 찬사가 순식간에 혐오와 낙인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 마음속에 극단적인 감정과 행동을 갖고 있습니다. 흠 없는 사람인 척 정상을 가장하며 특정한 사람이나 그룹을 비난하고 배제하려는 사람의 이면에는 그야말로 위험하고 추악한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다소 힘들더라도 조심스레 다양성을 인정하면 그 사회와 구성원의 공감과 관대함, 포용성은 커집니다. 온건하고 모범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만 남은 무미건조하고 가식적인 사회를 상상해 보세요. 경계성 인격장애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감정 상태나 충동적인 행동을 모두 없애버리고 나면,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모든 예술작품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문학과 음악, 오페라가 얼마나 많은 변덕과 극단, 자해와 자살로 가득한가요. 획일적인 규준과 정형화된 인격이 강요되는 현대 사회의 예술작품은 과거 위대한 고전의 격정에 비하면 창백한 모범생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 고통을 겪으며 경계성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짐작도 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매 순간 고통스럽게 겪어내며 텅 빈 눈빛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키키가 냉대와 실패를 뒤로 하고 도망친 장소로 용감하게 돌아가 좌절을 딛고 환대와 인정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장면은 너무나 큰 의미를 줍니다.



키키의 작은 씨앗


글을 마무리하며, 제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라고 하지 않고,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정신과적 진단, 특히 인격장애 진단은 매우 신중히 내려야 합니다. 진단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보지 않고 그 병만을 보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단은 그 사람을 병리화하고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합니다. 비록 그 인격이 자신과 타인에게 큰 고통과 혼란을 주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 모르는 미지의 무의식 속에는 놀라운 치유와 창조의 가능성, 더욱 심오하여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키키가 발견한 마음속 작은 씨앗들처럼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전체가 될 가능성이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고통을 병리화하여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온전한 인격을 가진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2024.01.27. (토)~2024.02.25. (일) CKL스테이지

* 극작 연출 기회: 조윤지

* 작곡: 김승민

* 기획: 홍지원

*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주관: 공연제작소작작

* 주연: 이수정, 이휘종, 남경주, 김수정, 문지수, 장두환, 이민규, 신진경, 전성혜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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