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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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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정결핍 Apr 14. 2024

남의 일기 7

남의 생일 일기

4월 13일,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유독 쨍쨍했던 오전 햇살에 눈을 떠서 아침 루틴을 간단하게 마치자마자 한 것은,

‘미뤄둔 설거지’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시끄러워 외면했던 설거지부터 했다.

‘생일이니까 좀 더 쉬고 내일 하자’ 가 아니라

생일이니까 나에게 평온하고 좋은 환경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새 고무장갑으로 교체하고

흰 빨래를 돌렸다.


그리고나서 샤워를 하고 찻물을 올렸다.


뽀송뽀송한 상태로 엄마가 소분해준 쌀을 불렸다.

냄비밥을 도전해보기 위해서,

유튜브 쇼츠를 보면서 따라했는데 제법 누룽지도 깔려있고

구수한 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생일날 먹으라고 한 팩 챙겨준 레토르트 미역국을 데웠다.

나도 미역국 쯤은 맛있게 끓일줄 아는데, 귀엽다.


냄비밥과 미역국과 김치를 놓고 밥을 먹으려다가

잽싸게 훈제오리, 소세지, 계란을 부쳐 ‘한국식 하울 정식’도 함께 곁들였다.


소소하면서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만들어둔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인강좀 듣다가 ‘패딩턴’을 보고 있는데 오후에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그때까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생각을 못했는데

친구가 ‘한강에 가서 돗자리 깔고 앉아있다가 영등포에 오징어회를 먹으러 갈래?’라고 했다.

사실 친구의 제안은 나의 취향에 완전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를 위해 생각하고 제안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러자 했다.


한강에 가서 돗자리를 깔고 친구가 선물로 가져온 귀여운 와인잔에 맥주를 마셨다.

친구가 눈을 감아보라해서 감았다가 떴더니, 세상 깜찍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커버 사진 참고)


친구가 늘상 장난삼아 하는 말이 자기는 늘 ‘멍순이(강아지), 조카, 너’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데

‘저기…혹시, 나를 정말 강아지나 조카로 생각하는거 아니지???’ 라고 말하면서도 사진찍는 친구에게 포즈를 취했다.


햇살 따땃하게 맞으면서 깡맥주를 마셨더니 1캔에도 알딸딸해지는 지경이라

더 있으면 눕고 싶어질까봐 빠르게 영등포로 이동하자고 재촉했다.

운좋게 바로 온 버스를 타고 창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멍때리는데

햇살은 따땃하고 바람은 선선해서 낮잠자고 싶었다.


나를 위한 셀프 선물을 살까 하고 교보문고에 들렀다.

여러 책을 구경하다가 평소에 좋아하던 문상훈님의 책이 눈에 띄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서서 몇 장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뺨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글 자체도 너무 잘 쓰는데, 중간 중간 손글씨에서 감정이 묻어나와 울컥했다.


수려한 문체가 아니라 손글씨처럼 조금 울퉁불퉁, 너무 솔직하지만 담담한 문체에..

(내 생일이라 그런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제일 좋은 날씨 주말 대낮 서점 베스트셀러코너에서 고개 푹 숙이고 우는 여자가 된 것이다.

마침 친구가 화장실에 갔어서 다행이지,

근데 사실 그 친구라면 ‘너는 여리고 감성적인 아이니까’ 라며 아무렇지 않아했을 것..


그러고나니 더 책을 고를 의지도 없고, 그렇다고 그 책을 구매할 생각도 들지않아 서점을 나왔다.

뭔가 그냥 담담하게 ‘오, 문상훈 책도 썼네..?’ 정도의 마음이었으면 구매했을수도 있겠지만

눈물까지 흘릴만큼 감명깊으니 오히려 구매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 마음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그냥 그 때의 그 감격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적으로 너무 이상적이고 오래보고 싶은 사람을

이성관계로 섣부르게 얽어, 다시는 못 볼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않은 심리..

인데 이마저도 이해하기 힘들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아무튼, 사실 며칠전에 가족들과 회를 양껏 먹어 오징어회는 별로 땡기지않아

양꼬치를 먹고 너무 배부르고 술올라서 일찍 집에 왔다.

(양꼬치도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친구가 계산했다.)


집에 누워 카톡을 보니, 기분이 요상했다.

연락올거라고 생각못한 사람들에게 연락이 와있고,

연락올거라고 당연히 생각한 사람들 몇명은 연락이 없었다.

(날씨좋은 주말이라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1월에 싸워 냉전중인 여동생은 생일축하한다며 10만원을 보내왔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인생이란 과목을 한장씩 배워가는 기분이다.

하루를 지나면서 1톨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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