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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 일기 Oct 11. 2024

남의 일기

남의 일기 14

‘1점??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


동생이 내 성격유형 검사 결과지를 보고 한 말이다.

나도 처음에 터무니없는 점수를 보고 속으로 같은 반응이긴 했다.


나는 요즘,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아직 2회 차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굵직한 고비가 다가온 시기마다 한 번씩, 상담센터를 찾았던 것 같다.

이번으로 3번째 상담센터 방문이다.


사람들과의 크고 작은 마찰이 잦아지고 불안감과 초조함이 올라가고 갈수록, 흔들리는 자존감..


아니, 내가 자존감이라고 부르짖던 그것들이 ‘진짜 자존감일까?’라는 의문을 품자마자 바로

내가 알던 세상이 뒤집어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견고하게 철옹성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건만,

위태위태하게 이 빠진 젠가 탑이었던 것이다.


‘슬슬 갈 때가 됐다.’

생각이 들어서 집에서 가깝고 교통편 괜찮은 심리상담 센터를 알아봤다.


첫날, 검사받은 성격유형 검사 결과지를 받았다.


선천적인 기질에서 충동성이 95에, 위험회피성이 90이 나왔다.

충동적으로 상자는 까놓고 도망가거나 숨어버리는 나 그 자체 아닌가?

일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뒷수습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내가 한다.

(아, 자살, 자해 가능성 등의 점수는 현저하게 낮게 나왔다. 상담받으려는 것 자체가 ‘잘 살기 위해서’ 니까)


그리고 성격은 계속 바뀌는 건데,

자율성이 1점, 연대감이 3점 나왔다.


참고로 100점 만점이다ㅋㅋㅋㅋㅋㅋ


수포자로서, 수학 점수 최저점보다 저렇게나 낮은 점수는 처음 본다.

애초에 성격유형 검사 같은 거에서 1의 자리 숫자가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인지도 몰랐다.


근데, 결과지 해석해 주시는 선생님은 살짝 난감해하며 위로했지만 나는 그냥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연대감이 박살 난 느낌이 더라니..’

인정의 실소였다.


나는 청소기다.

새삥에 디자인도 멋지고 의기양양한 청소기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겉모습에 비해 모터는 약했으며, 먼지통은 컸으나 자주 비워주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하며 흡수했던 모든 일들이 먼지통에 자꾸 쌓였다.


자꾸만 쌓였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먼지를 빨아들이려 했다.

근데 마음처럼 먼지가 빨아들여지지 않았다.


가끔은 열이 올랐으며, 점점 배터리 유지 기간이 짧아졌다.

바닥에 그대로 남아있는 먼지를 보면 먼지통에 든 먼지가 썩어갔다.


계속 썩어갔다.


그래서 먼지통을 비우기로 했다.

가능하면 모터도 더 좋은 놈으로 달고.


내가 어떤 청소기인지 알아가기로 했다.


한동안은 청소기 수리 일기가 될지도 모른다.

자주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각나면 쓸 것이다.



아, 동생이 내 점수를 보고 얘기했다.


‘언니 연대감 점수 올라가도록 내가 더 노력할게’


사랑스러운 동생의 말에 연대감 점수가 벌써 10점이 되었다.

카톡으로 대화한 거라 다행이다.


우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이고 싶지 않으니.


끝으로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의 먼지통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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