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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ZURE POET Aug 15. 2023

라떼는, 진짜 나때는2  - 전학 온 소녀

시간을 저어가는 삶을 위한 향연

라떼는, 진짜 나때는 2

 

요새로 보면 세계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남해안 작은 섬마을 오지, 교훈이 ”열심히 일하며 부지런히 공부하자“이고, “남도에 자랑인 고천암의 넓은 들녘/ 높이 솟은 큰봉산(해발 60미터)의 힘찬 정기 물려받아 ~~•가 교가인 지금은 폐교 된 자랑스런 나의 모교 징의분교의 아마 3,4학년 시절 있었던 잏리다. 이거슨 실화이다. 위 1에서 얘기가 나온  기념일 ’의식의노래‘와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이다.

 

우리 마을은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고 빠지면 육지가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건너편 화산면 가좌리와 방조제로 연결하고 요새 유명한 ’해창막걸리‘의 고향 해남 해창을 포함하는 드넓은 만호바다의 갯펄밭을 간척지 논으로 만들어놓아 지금은 섬마을이라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1970년대에는 인구가 600명, 마을 골목마다 어린이가 가득하고 황산남국민학교 징의분교이지만 요즘 농어촌 지역 면소재지의 웬만한 초등학교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 전교생 150명이 모두 한 마을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에 어린이 날이나 운동화가 있거나 소풍을 가는 날이면 온동네 사람이 모두 모이는 마을학교였다.

 

때는 호국보훈의 달 6월, 6.25기념일이 다가올 무렵부터 6.25기념일이 지난 뒤 어느 때쯤까지 설정할 수 있겠다. 역시 사건의 절정은 6.25 당일이었다.  이날 6월 25일, 여느 기념일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전교생은 운동장에 모여 6.25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우리 학년 남학생 열 댓명이 좋게 노래를 부르다 뚝 끊기는 일이 발생하고 밀았디.

 

아~ 아 ~ 잊으리야 어찌 우리 zzzz..

우리는 교실로 들어와 선생님께 혼나고, 대청소 하고, 집에 늦게 가고 했다. 우째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바닷가 갯바위, 갯뻘바탕과 모레사장이 놀이터인 우리 섬마을 조무래기들은 맨날 푸른 바다와 갈색 펄밭에서 엄청난 갯것들과 함께 자연인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살기 때문에 피부색이 거의 검둥이이었다. 특별히 또는 굳이 부득부득 빡빡 밀어 씻어야 할 필요도 없어 때가 끼어 검은색인 데 보탬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국민학교 졸업 탈 때까징 팬티, 빤쓰라는 것도 모르고 컸다. 그리고 들로 산으로 바닷가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대막가지 들고 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솔공과 다장개비 솔가지로 불을 피워 뒷다리 궈먹고...

덜 익은 보리 모가지 잘라 갯바위 위에 구워서 손으로 부벼 입에 털어넣어 오물오물 씹어 먹으며 새까메진 입주댕이 보고 서로 웃다가 저만치 가서 남의 밭의 곡식을 뜯어 먹고 있는 소한테로 뛰어가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대막가지 낚시대를 둘러매고 갯바위에 나가 비닥이나 문저리를 낚아 해질무렵 풀줄기에 꿰어 집으로 돌아오고...

 

그해 봄 어느날, 이런 원시인 마을에 어느날 온 몸이 희디 흰 한 소녀가 전학을 왔다. 전학이라는 말 몰랐고, 하늘나라에서 선녀가 내려오듯이 그냥 러디서 툭 떨어졌다. 이거슨 일대사건이었는데 흑인 어린이 나라에 백인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애는 우리들에 비하면 너무너무 예쁜 옷을 입었고 살이 햇빛으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것 같은 정말 정말 ... 하앴다.

 

우라학교는 학년마다 1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한 학년에 여러 반이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작은 문화충격을 받랐다. 그 소녀는 우리와 같은 학년이었다. 즉각,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단어도 들어보지 못한 채로,  사랑에 대한 테레비 연속극 한 번 못 본 채로 모두 급 ~ 사랑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이거슨 자연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를 눈치 보고, 친구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운 마음을 맛보고 마음이 야리야리해지 신기하고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좋아한다”는 어휘만 알았던 것같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zzzz

 

우리는 그 소녀를 ‘이나’라고 불렀다. 우리가 어렸을 적, 1970대에는 TV방송이 우리동네까지 와주시지 않아서 마을 사람 전체가 소리와 글자가 일치하는 언어 사용을 하지 않았다. 내 친구의 이름은 명남, 병섭, 병산, 평규, 현복 ...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죄다 맹남이, 뱅섭섭이, 뱅산이, 팽기, 핸복이... 이렇게 불렀다. 내 이름도 민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미니”라고 불렀다.

 

‘이나’의 이름은 ‘인화’였다, 박인화. 한참 뒤 나중에 알고보니 인화 가족 - 인화 엄마, 인화 큰언니, 작은언니, 인화 - 이 귀빠진 우리동네에 오게 된 사연은 이렇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살았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가 먹막했고, 결국 우리동네에 사는 인화 엄마의 언니(즉 인화의 이모)를 찾아 우리 동네로 이사 오게 되어 인화도 전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인화을 ‘이나’라 불렀다.

 

그해 6.25기념일이 다가올 무렵,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6.25노래를 연습할 때부터 우리는 각자 주저주저했고 영문을 모르는 선생님은 애를 먹고 있었다. 6.25노래 연습 도중에 갑자기 남자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뚝 끊기며 잠잠해지곤 했는데...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나룰(이날을, 인화를)~

했다가는 동무들에게 엄청난 손가락질+깔깔거리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거슨 봉변+힐난+질투+인민재판+테러+결튜이었다. ‘이날을’ 부분을 소리내어 부르는 것은 동무들의 가차없는 손가락 총을 정신적으로 쓰러질 때까지 맞아야 할 각오가 돼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와~ 와~, 너 이나 좋아한다고야아?”

‘하 하 하 ~~“

”ㅇㅇ는 이나 좋아한대요~~ 좋아한대요~~~“

 

암, 아무리 국가에서 만들어 브르게 하고, 우리가 공산당을 죽도록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 이 부분은 공개적으로 못 부르지, 맞지, 맞고 말고....

 

우리둘의 사람, 우라들의 천사, 우리들의 두근두근 선녀... 흰둥이 보송이 ‘박인화 소녀’는 는 지금 제주도 ㅇㅇ읍 시장 안에서 [ㅇㅇ이네 국밥] 집을 하고 있다. 태풍을 피해 몰려든 어선들, 중국어선들에서 몰려들어오는 뱃서람들릐 거친 말을 척척 받아피고 게 호통치며 따수운 국밥에 소주 맥주를 달인처럼 내어주는 멋진 무서운 아짐시기를 거쳐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보고싶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아~ 아~ 잊으리야 어짜 우리 이나를 ~~

아~ 아~ 앚으랴 어찌 우리 인화를 ~~~


 

제주에 가게 되걸랑 ㅇㅇ읍 ㅇㅇ시장, ㅇㅇ국밥집에 가서 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마시고 미소 한 번 짓고 나오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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