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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싶다 Jul 14. 2017

<오직 두 사람> 후기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 추운 겨울,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모여 있는 고슴도치들이 서로를 찌르지 않고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거리를 둔다는 우화에서 나온 말이다. 홀로 있으면 외롭고 같이 있으면 괴롭다고 하던가. 사람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때로는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차피 타인은 타인일 뿐, 상대가 내 아픔을 100% 이해해 줄 수 있을리가 만무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00% 이해할 수 있다고 억지로 믿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동명의 소설을 포함한 7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오직 두 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 ‘나와 타인간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 있고 그 벽을 넘어서려는 순간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의 원점>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시절 첫 사랑 인아와 내연의 관계이다. 인아는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에 시달리고 있고, 주인공은 내연 관계를 남편에게 발각 되었다고 느낀 순간부터 인아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아는 남편을 둔기로 가격해 기절시킨 후 어찌할 줄 몰라 주인공을 부르게 된다. 도착해 남편을 보니 놀랍게도 그 남자는 주인공이 알고 있던 ‘남편'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인아에게는 주인공 말고도 다른 내연남이 있었으며 주인공은 그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더 이상 인아의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며 주인공은 그 자리를 외면하고 빠져나온다. 얼마 뒤 남편은 퇴원하고, 인아는 자살한다. 나중에 인아의 다른 내연남은 인아의 남편을 습격해 그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린다. 

주인공은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다음과 같이 읖조린다. 

“인아의 죽음을 두고 …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아는 죽었고 그 남편도 죽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태가 될 것이고, 사채업자(인아의 다른 내연남)는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인데, 자신만 아무 일 없이 무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문득 기가 막히게 좋았다. 행복감이 솟구쳤다. 엄청난 유혹을 이겨내고 위기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 냈다는 것에 자부심마저 들었다.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인생의 원점>의 주인공이 타인에게 얽히지 않겠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켜냈다면, <오직 두 사람>의 주인공 ‘현주’는 정확하게 반대의 선택을 한다. 아버지가 정해준 전공을 선택해 그에 맞춰 삶을 살아왔으며, 주말마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인생은 언젠가부터 없어져 버린 채, 그 관계에 중독되어 버린다. 현주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내 인생은 뭐가 남았지? 아빠와의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인생의 원점>의 주인공과 다르게, 현주는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는 걸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예견이라도 했듯, 현주의 어머니는 일전에 현주와 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럼 이번에는 기어이 가겠다는 거니? 확실해?” 

엄마가 재차 확인을 했어요. 하지만 전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어요. 엄마의 눈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어요. 제 삶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때일 거에요. 그 후로 엄마는 단 한 번도 제게 따뜻한 눈빛을 보여준 적이 없었어요. 엄마가 방을 나가면서 말했어요. 

“네가 선택한 거야, 아빠가 아니라. 그건 분명히 기억해둬.” 


그 선택의 대가는 가혹했다. 단지 현주는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현주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파탄이 나 버렸으니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는 마치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단 한사람으로 남은 느낌이라는 현주. 하지만 현주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 비록 쓸쓸하고 허전할 지언정, 그 모진 중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타인은 타인일 뿐, 심지어 가족이라 해도 다를 바 없다는 건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는 무늬만 가족일 뿐,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유괴 당했던 아들 성민과, 아들을 찾기 위해 지난 11년간 사는게 사는게 아닌채 살아왔던 윤석과 미라. 우여곡절 끝에 성민이 돌아오지만, 성민이 돌아오면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윤석의 기대는 시간이 지날 수록 무너져 간다. 잃어버린 순간의 ‘성민’만을 기억하는 윤석에게 성민은 너무나도 다른 아이였고 설상가상으로 조현병에 걸린 아내 미라의 자살로 인해 그 괴로움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잘못이 있다면 성민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태어난 것, 낯선 여자에게 유괴를 당하면서도 울지 않은 것, 겨우 데려다 놓았는데도 제 엄마를 돌보지 못한 것.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어 윤석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타인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실망 혹은 분노를 표출하며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마치 다른 고슴도치에게 찔린 고슴도치가 더욱 가시를 세워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고슴도치가 집단의 온기를 나누어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적당히 그 가시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 미묘한 간격을 두고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나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영하 작가가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게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곁에 있는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아니라 국가의 무능으로부터 비롯된 국가의 책임 의식의 부재가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에 준 상처였다. 그리고 그 상처를 받은 이들끼리 서로 갈라져 싸우기까지 했다. 이런 온갖 추잡한 사회의 민낯들을 지켜보며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별로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좌절하고 있는 형국이다. 마치 탈출에 대한 희망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신의 장난>의 네 남녀처럼.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와 같이, 바로 말하든 거꾸로 말해도 뒤집을 수 없는 진실. 너와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그리고 힘든 시간이 와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이후를 어떻게든,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처입고 상처입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이를 비난하지 않고 홀로 눈물을 삼키고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딜레마를 일깨워주는 단편들의 모음집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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