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생각하는 일상의 가치
삶은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어느 순간에 딱 하고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와 동일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만약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 하루라면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만약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일분일초를 아껴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그동안 못다했던 감정 표현들-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을 아낌없이 전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외모, 말투, 표정,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 속에 담아두고 따뜻하게 안아준 채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100세, 200세까지 산다면 어떨까? 아직 죽음이 멀었기에 그 때는 일상을 충실히 보내는데 집중할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회사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불금에 술 한잔하고, 주말에 애인과 함께 어딘가 훌쩍 떠날 생각에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렇게 살면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봤을 때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지 라고 말할 수 있는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다.
그런데 어떤 생을 살아가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인정 많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건 동일하다.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보내는 방식의 차이는 그저 내 생의 마지막을 언제로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삶의 딜레마는 내가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데 있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당장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내 삶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될 것처럼 살고 있다.
희곡 <우리 읍내>의 초중반을 장식하던 인물들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월리가 급성맹장염에 걸려서 죽을지, 에밀리처럼 해산 중에 죽을지, 아니면 조오처럼 전쟁에 끌려가서 죽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어떻게 죽을지 알았더라면 그들의 삶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에밀리의 이 말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삶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삶 속에서 인지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위에서 말한 하루를 보낸다면 일상은 망가질 것이다. 그렇기에 만족스런 일상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더 웃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데 집중하고 싶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보내려 한다. 비록 일상이 길가의 조약돌처럼 시시함과 지루함의 연속일지라도 삶이 끝나고 돌아봤을 때 눈부신 구슬이 되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오늘이 쌓이면 더 빛날 것이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