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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자 Aug 04. 2021

마지막 그 남자 이야기

난 무엇을 사기당한 걸까. 


그 일이 벌어지고 세 달이 흘렀다.

마치 삼 년이 지난 것 같은데... 


그날, 그리고 그 이후 몇 번,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겪었던 그 사람, 내가 알던 그 남자.

우린 전화 너머로, 상대방의 그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가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랐던 모습에 서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략 삼 년 전 2018년 즈음, 사십 대 중반 미혼이었던 그녀는 지인 소개로 그를 만났고,

지금까지 만나왔던 비슷한 나이 때 남자들과는 다르게 말끔한 외모와 수려한 언변을 갖춘 그가

꽤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돌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서로 좋았으나 그는 갈수록 거짓말이 늘었고 싸울 때면 가끔 험한 욕설을 뱉기까지 했다 한다.

나에 대한 그의 한결같이 온화한 매너와 그의 가족에게 나를 소개해준 일화를 듣고 그녀는 크게 기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지낸 지 삼 년이 흘러, 결혼 얘기까지 오가는 관계가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처음 전화를 한 날이 바로 제주에 신혼집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집에 머물었던 때였는데

우연히 핸드폰에서 내 카톡 메시지와 사진을 보고 나에 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도 날벼락이었던 셈이지. 나에게 그녀처럼.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었다고...


오래 생각해봤다. 

무슨 심리였을까. 

물론 누구나 이성을 여럿 만나면서 저울질할 수는 있다. 

하지만 본인에게만 의지한다고 믿는 여자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아직 확신을 주지 않는 여자는 계속 간을 보며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되길 바랬던 남자.


이것이 불안정한 이팔청춘들의 연애 문제라면 충분히 있을 법도 하지만 남은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년들에게 이런 일은 해프닝이 아니라 엄중한 '치정 사건'이다.    

다행히 이 일은 치정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진 않았다.  


그 남자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 그날 이후, 그에게 가졌던 연민, 사랑, 애틋함 그 모든 말랑말랑한 감정들은 뜨거운 커피 위의 휘핑크림처럼 순식간에 없어져버렸다.

그런 성격은 나의 가장 큰 장점이다. 

신뢰를 잃은 사람에게는 저절로 정까지 떨어져 버리는 So Coooool 함. 


그날 이후 그 둘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아마도 그에게 계속 연락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그런 성격을 일찍이 알고서도 몇 년을 알고 지내다 못해 결혼까지 결심했던 걸 보면... 


내 핸드폰엔  그의 연락처, 주소, 사진 등 모든 것들이 삭제됐다.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과거는 어떻게 정리해야 하지... 

내 인생에서 그 3년의 시간을 도려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살면 될까?

애들 아빠와의 힘들었던 시간을 망각의 늪으로 몰아넣고 그때 아이들과의 추억도 덩달아 잃어버렸던 것처럼?

잊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강한 보호본능 때문인지 힘든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만 동시간대 좋은 추억, 의미 있는 시간들도 함께 망각해버리고 만다.

굳이 잊으려 발버둥 치지 말고 천천히 흘려보내는 게 맞는 것 같다. 

'인연'이 서로 곁에 머무는 거라면, 인연이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닐지...

그래서 머무는 것들은 머무는 대로, 그렇지 않은 것들은 흘러가는 데로. 


이왕 마음을 낸 김에 더 내볼까.

그가 잘 살길 바라겠다. 

이렇게 됐다고 빨리 죽어라.. 하긴 싫다. 그런 미움도 없다.

(사랑이 아니었나? 아프지 않은 걸 보면?) 


돌이켜보면 연민으로 시작된 감정이었으니 다시 그 마음을 내어본다.

그가 건강하고 더 이상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길 바란다. 

마음도 단단해져서 여러 개의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기를.

전생에 그에게 진 빚은 이걸로 퉁 치고, 다시는 인연이 되어 만나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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