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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프터문 Jan 04. 2016

사자와 깁스

참나무 식탁, Table 001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거실 중앙에 커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소파도 없어서 

식탁이 온통 거실을 차지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당시는 소파도 식탁도 익숙지 않은 시절이었다.

상을 펼쳐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바닥에 요 이불을 깔고 자는 익숙했던 시기에

갑자기 거실을 차지한 식탁은 동네에서도 화제였다.




유치원에서  점심때쯤 집에 돌아오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오오 식탁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의자에 앉는 것이 어색하다며 양반 다리를 한 아주머니를 보고 

촌스럽다며 웃기도 했지만  

나중에 돌아갈 때쯤이면 

다들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앉아있었다.









식탁은 어린 나에게 너무 높았다. 밥을 먹기에도, 글씨를 쓰기에도 높았다. 

엄마가 터진  이불솜을 넣어 방석을 만든 뒤 줄을 달아 의자 뒤로 묶어주었다.

방석 덕분에 높아진 의자 위에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빠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맞은편에 앉은 아빠는 일일 공부 학습지를 펼쳐놓고

선긋기와 같은 동물 그림 찾기를 하는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늘 사자와 호랑이를 구별하지 못해서 

아빠가 사자의 갈기를 그려가며 가르쳐 주었고

옆에 앉은 언니는 넌 사자도 모르냐고 놀려대며 숙제를 했다.

동생은 식탁 아래에 앉아 크레파스를 늘어놓고 그림을 그렸는데

아빠가 무심코 크레파스를 밟아 뚝, 부러지면 

동생은 잠들 때까지 울었다.




 어느 날 식탁에 부딪혀 팔에 금이 간 동생은 두 달 동안 깁스를 하고 다녔고

두 달이 지난 뒤 아빠가 마당에서 실톱으로 깁스를 잘라 주었다.

아빠가 톱질을 하는 내내 동생은 무서워서 엉엉 울었고

나도 엉엉 울었고 언니는 우는 나를 놀렸다.   

봄햇살이 눈부시던 날, 

깁스의 석고 가루가 꽃가루처럼 마당에 흩날렸고

엄마는 황급히 빨래를 걷었다.

 





방학에는 식탁에 둘러앉아 수박을 먹고 탐구생활을 풀었다.  

세수 안 한 얼굴로 둘러앉아 수많은 누룽지를 먹었으며

식탁 옆에 앉은 엄마는 겨울마다 장갑과 스웨터를 짜 주었다.

내가 쓰던 높은 방석은 동생이 쓰게 되었고, 

아빠는 동생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유치원생이던 내가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집을 떠날 때까지

식탁은 늘 거실 중앙에 놓여 있었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았다.

때로 엄마는  방위성금을 줄 만큼의 돈도 없었고 

텔레비전을 보고 싶으면 통장 아주머니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쇠고기는 아빠 생신과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고

어쩌다 조기 반찬이 나온 날이면 나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신났다.



 

 

보풀이 피고 무릎이 닳은 내복을 입고  뛰어다녀도,

1학년 때 물려받은 책가방을 4년 동안 메고 다녀도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식탁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때는 다른 집에 없는 특이한 가구에 불과하였지만

그때 우리는 식탁 주위에서

누구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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