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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프터문 Feb 13. 2018

새우

여기야.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38살의 얼굴이 앉아있었다.

12년 만에 보아도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마른 얼굴. 

그러고 보니 눈 끝이 조금 쳐진 것 같았다. 

내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점원이 얼른 메뉴판을 가져왔다.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는 소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우리 앞에 

주사위처럼 잘라 간장을 끼얹은 두부와 소주 한 병이 놓였고

5분 후에는 가스레인지에 얹은 해물 오뎅탕이 놓였다. 

따가각, 소리를 내며 그가 소주를 돌려땄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숨 막히는 사랑의 터널을 정신없이 통과한 뒤 

터널 끝의 빛처럼 부서지듯 흩어져버린 사람들이었다. 

터널이 끝나는 순간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빛 속에서 휘청이다

각자의 길로 멀어져 버린 사람들이었다. 

미련 때문이었는지 초조함 때문이었는지

헤어져도 친구로 지내자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한 대가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기회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가슴 한편에 첫사랑을 담아둔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지만

그의 가슴에 내가 손가락만큼이라도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딱히 서운하다고 느끼지 않은 까닭은

나에게 그 역시 

첫사랑 운운할 때 피어오르는 아련함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련과 초조함이 가시고 담담한 일상이 찾아들 즈음에야 

우리의 어리석은 약속이 중요한 것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그의 뒤로 쏟아지는 빛을 보니 해가 지려면 1시간은 족히 남은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진 그는 언제나처럼 숟가락을 일찍 놓았다. 나도 숟가락을 놓았다. 



맛없어? 그가 물었다.

아니. 빵을 먹고 나왔더니 배가 안 고프네.

그럼 맛있는 것만 골라먹어.

오뎅탕에 그렇게 맛있는 게 있을까? 내가 피식 웃었다. 

가만있어봐. 그가 머리를 기울이더니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오뎅탕이 다시 끓기 시작하자 햇살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퍼져나갔다. 

뜨겁게 피어올랐다가 형태 없이 흩어지는 수증기를 보고 있으니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개가 자욱한 뇌의 오래된 주름 사이에 옅은 불빛이 드리우는 것 같았다. 

술이 취하네, 생각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헤치듯 그가 숟가락으로 오뎅탕을 휘휘 저었다.

뭔가를 건져 자신의 접시로 가져가더니 

잠시 후 팔을 뻗어 내 숟가락에 무언가를 얹어놓았다. 말끔하게 껍질을 벗긴 새우였다.



먹어. 좋아하잖아. 

응?

너 새우 좋아하잖아.

내가?

너 새우 좋아했잖아.




그때 반짝,

뇌의 오래된 주름에 빛이 켜졌다. 









스무 살, 우리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규정하던 시절

학교 앞 식당에 가면 그는 늘 갈비탕을, 나는 새우볶음밥을 주문했다.  

다른 메뉴도 많았지만 우리는 고민 없이 대체로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30여 가지 음식을 파는 대학교 앞 식당에서는 무얼 주문하든 

미원과 맛소금과 후추 냄새가 나는 음식을 받게 마련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새우볶음밥과 갈비탕이 유난히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왜 그랬을까. 



새우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엄지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왜 그래. 

껍데기에 찔렸어. 얼른 먹어, 식는다. 



그는 가스레인지 불을 줄인 뒤 숟가락을 들어 다시 오뎅탕을 저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숟가락을 보며 내가 물었다. 

너 갈비탕 좋아하냐. 

아니. 갈비탕 먹고 싶어?

아니.

아. 찾았다. 한 마리 더 있더라니. 

그가 또 한 마리의 새우를 건져내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딱히 새우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지 알만큼 먹어본 적도 없었다.

돈 없는 대학생이던 그와 나는

허름한 중식집의 싸구려 칠리 새우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먹은 새우는 

새우볶음밥이라 불리는 맛소금 범벅에 얹혀있는 손톱만 한 조각이 전부였다. 

맛도 모르는 음식을 왜 매번 주문했을까, 하니

그때 나는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뭘 먹을지, 이게 맛있을지 저게 더 맛있을지 같은 고민은.




무엇을 먹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에 가는지도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먹든 어디에 있든, 

눈 앞의 존재 하나로 충분했던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가난한 줄도 모르고 무엇이 부족한 줄도 몰랐다. 

감각과 욕망과 배고픔을 잊게 했던 존재,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처럼 두 눈을 뜨겁게 했던 존재, 

20년 동안 보아온 다른 모든 열망을 무색하게 했던

다시없을 불가사의한 존재를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잃어버렸다. 







얼른 먹어. 그가 새로 깐 새우를 내 숟가락 위에 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숟가락을 들어 두 마리의 새우를 입에 넣고 씹자 

오뎅탕의 뜨끈한 국물이 꾸욱 배어 나왔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문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뇌의 오래된 주름 사이로 

뜨끈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 지나갔다. 







애프터문 테이블 003  백참나무(화이트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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