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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Jul 29. 2022

그 남자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발트해를 건너 에스토니아의 탈린으로 가는 페리에서 내리자 그 남자가 보였다. 우리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여행한 뒤 이제 발트 3국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긴장된 모습의 남자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든다.

그의 선해 보이는 얼굴에 이국의 그림자가 어려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지 꽤 되었겠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사는 장소에 따라 얼굴 모양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여행을 가서 만나는 현지 가이드들은 토종 한국인임에도 어딘지 낯섦이 묻어있다. 일종의 현지화라고 할까. 그럴 때는 ‘신토불이’를 떠올린다. 그곳의 어떤 식습관이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보다 남자를 만날 때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는 자신을 소개한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버스를 타고 여기 에스토니아의 탈린으로 왔으며 말이 어눌해도 이해해 달라며 반갑다고 말한다. 팬데믹 이후에 두 번째로 맞는 손님이라는 그의 인사에는 간절함이 있다. 20대 때에 홀로 이 먼 곳으로 날아와 현지에서 가정을 이루게 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언뜻 묻어난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러시아 때문에, 한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주변의 작은 나라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졌음을 그는 어렵게 뱉어내었다. 빌뉴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에서 조그만 일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원재료 값이 너무 올라 수지를 맞추기 어렵다고 했다. 원재료가 오른 만큼 값을 덜컥 덜컥 올리기도 힘들어 이제 뭐 다른 것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줄 힘센 고래도 알기는 하겠지. 힘센 자가 휘두르는 칼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통 사람의 목덜미를 내려치고 있는 꼴이었다. 벌써 6개월간 지속된 이 싸움에 국제 유류 가격이 계속 오르고 유럽 각국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천연가스 값이 올라 힘없는 나라들의 에너지 수급이 문제라고 뉴스에서도 자주 떠들고 있다.


우리만 해도 서울에서 환승 공항인 바르샤바까지 12시간이 걸렸다. 러시아 하늘을 이용하지 못해 과거보다 두 시간이 더 걸린 거라고 했다. 세계는 질기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 북유럽과 발트 3국 여행에서 다시 깨닫는다.


침엽수와 호수와 자작나무가 연달아 나타나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달리 이곳 발트지역은 고요한 평원이 계속되었다. 발트 3국에는 산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300미터 급의 산이 하나 있기는 하다고 했다. 지평선을 따라 고정된 시선을 계속하다 보니 우리 삶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부침이 없는 고요한 삶이 좋기만 할까. 땀을 흘리며 산에 오르는 성취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긍심과 앞으로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다니면서 멀어서 잘 몰랐던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조금씩 눈이 뜨였다. 작은 나라, 작은 인구, 긴 시간 동안 유럽의 변방으로 , 강대국인 러시아의 속국으로 역사의 주체이기보다 객체로 살아왔던 아픔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사이 이 먼 나라에 오게 된 현지 가이드의 고단한 삶이 하나씩 풀려 나왔다.


일거리를 찾아온 서울에서 하룻밤 노숙 경험을 하게 된 뒤 인생에 대해 자신감이 부쩍 생기더라는 그, 어디에 붙은 건지도 잘 모르면서 일식 주방장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덜컥 지원을 하여 오게 되었다는 그의 순박한 얼굴이 따지고 묻기를 싫어한다고 쓰여 있었다.


젊은 나이에 맨몸으로 부딪혀 한 5년 고생한 뒤에 고국에서 가게를 얻을 밑천을 마련하려던 그의 계획은 주말에 갈 곳이 없어 교회에 갔다가 만난 바이올린 전공의 현지 여대생과 사귀게 되며 아예 눌러앉아 버린다. 버는 돈의 대부분을 고향에 보내는 빈털터리임을 알면서도 사랑한 이국의 처녀가 아내가 되었다. 처가살이를 거쳐 지금은 내 집을 마련하고 잘 자라고 있는 아들까지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어쩔 수 없음을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귀국 비행기를 타는 우리를 차마 보지 못한다며 호텔 로비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던 남자,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으나 첫 아이가 출생 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살아난 탓에 더 이상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다는 그가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응원하는 마음을 호텔 로비에 쏟아 놓은 채 우리들은 돌아섰다.


먼 곳을 찾아온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알려주려 하던 그의 표정과 목소리를 마음에 담아와서 그가 그리던 고향 하늘에 뿌려 놓는다. 그가 본 하늘과 이곳의 하늘이 오늘은 똑같이 맑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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