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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qrie Dec 07. 2024

우연(偶然)

“우연을 가장한 필연”스러움을 벗어버리며

군산 비응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처음 선유도를 방문했던 무렵이었다. 1년 가까이 오직 일로 오가며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모두 마무리하며 허허로운 마음이 들었다. 이내 바로 상경하지 않고 이틀 휴가를 얹어 군산 인근 관광지를 돌아보겠노라 큰맘을 먹었다. 평소 궁금했던 이름의 섬들과 해변과 맛집을 다니며 다시 오지 않을 사람처럼 샅샅이 훑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20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옮길 작정을 했다. 막연히 무언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격랑(激浪) 같은 내적 욕구도 어느 정도 있었고, 당시 한참 심취했던 하이데거 존재론의 실현으로써 자유자로서 울타리도 넘어보고 싶었다. 결국 주인의 채찍을 빼앗아 스스로 채찍질을 하는 가축의 태도 -아직 주변에 넘쳐나는 ‘자기계발’ 만능주의-를 벗고 내 스스로 가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심이 가득하였었던 때문이었다고 당시 다이어리의 메모는 일러주고 있다. 

[노도(怒濤): GZDZ@제주 주상절리, 2016-09]


그런 마음을 품고 있던 어느 날 외근을 나가는 길이었다. 뒤늦게 회사의 도움을 받아 다녔던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지금 회사의 대표를 우연히 마주쳤다. 같은 건물 기술보증회사 업무를 마치고 나오던 중이었던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을 이미 알고 있던 그도 연락을 줄까 고민을 하면서 건물을 나오던 길이라 했다.

지나가는 말로 얼굴 한 번 보자는 인사만 가끔 주고받던 시절이었음에도 그날 10여 분 남짓 주고받은 근황 가운데 내가 바라던 일의 구상과 그가 진행하는 사업의 시도가 절묘함을 자아냈다. 대화 중에 기회가 오면 같이 비즈니스를 하자고 빈말처럼 나눴던 학생 시절 일화도 소환되었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 약속하고 자리를 마쳤다. 물론 그 이후 이야기는 잘 마무리되었고, 지금 6년 넘게 함께 일하며 좌충우돌 우여곡절을 같이 겪어 가고 있다. 

[착시(錯視): GZDZ@청계천변, 2023-02]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을 의미하는 우연(偶然)이라는 단어는 너무 익숙하다. 그 말은 절묘하게도 듣는 이에 따라 막연한 설렘을 내포하게 하여, 반려처럼 “필연(必然)”을 소환한다. 세상사 모든 일에 기승전결이 있고, 원인과 결과를 따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모두 설명하기 어려울 때 뭉뚱그리는 표현으로는 안성맞춤이라 생각된다. 한편으론 너무 흔해 식상해버린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은 오래된 표현 낭비 때문에 꺼리게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연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므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기는 쉽지 않다. 증거를 우선시하는 과학자들도 잘 모르겠다는 표현을 에둘러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보다는 우연의 크기는 더 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듯 우연은 반복되는 일상 중에 불현듯 발생하며, 우리 일상 가운데서 겪는 모든 장소와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점 없는) 시간 중에 찾아올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오기 때문에 닥쳐온 시간에 좋은 기회를 발견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인연을 맺게 된다는 주장 또한 굉장히 설득력을 갖게 된다.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처럼”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문학과 지성사, 1992>


 내가 겪은 ‘우연’의 속성은 늘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가 잠깐 빈 시간과 공간 사이를 찾아 방문하는 낯익은 손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연을 알아보고 맞이한 것도 나였고, 받아들인 것도, 그 순간 내려진 선택에 따른 일들도 모두 내가 주체자였기 때문이다. 허수경 시인이 일갈한 문장과 같이 무언가 정리돼 떠난 것 같던 그 순간에도 나에게는 어떤 욕망 혹은 미련이 있었을 터이고 끝끝내 내게 쏟아지는 다른 순간들이 연거푸 문이 열리면서 우연처럼 천천히 다가와 길을 내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되짚어 그날 내 외근이 취소되었거나, 여유 있게 일정을 잡고 일찍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에 앞서 나이 들어 공부를 더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더라면 …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서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딱히 당시 하던 일에 부침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내가 불성실을 지탄받을 위상이나 부진을 겪지도 않았었기에 주변은 나의 결정을 참 안타깝게 여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쉬운 이해의 범주는 아니었다.

 결국 닥쳐온 우연과 필연이 조화를 이루고 준비된 자가 우연 가운데 기회를 만들어 밝은 미래를 꿈꾼다는 듣기 편안한 ‘희망찬’ 사건은 최소한 나에게 있어 사실에 부합하지 않았다. 여전히 막연한 불안과 몰려드는 일의 고단함은 마찬가지며, 어제에 이어 다가온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지금 내게 실재하는 현상일 뿐이다. 그 때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내가 작동시킬 수 없는 스위치가 눌려져 닥쳐오는 시간을 몸으로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다는 기억만 남았다.

 한 철학자는 ‘자기 기만’ 이라는 인간적 속성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거울 속 이미지의 자아를 흠모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우연’은 일상 속 당연한 체험의 언어가 되어 버렸다.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우연한 것은 없다던 아인슈타인의 주장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필연적 우연을 주장하고 싶은 무수한 도시 로맨티스트들의 얕은 속내도 이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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