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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담 Jul 21. 2020

일기 쓰기를 멈췄던 날들.  

날숨과 들숨의 이야기 :  아일랜드 알렉산더 테크닉 학교를 마치고  

커네마라 아일랜드. 흔한 양 친구들


시차적응이 유난히 어려운 것을 보니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 건가 싶다. 어른(?)들이 들으면 콧방구를 치시겠지만. 아일랜드의 3년 3개월이 꿈같이 흘렀다. 어느덧 서울 한복판, 돌아온 엄마집 창문 모기장에 코를 벌렁이며 자가격리를 하고 있다. 어제는 검사 결과 음성 판정 문자를 받았다. 아니 2주 집에 있는 게 뭐 그리 힘든가 했는데, 고작 나흘 째 되는 오늘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늘 들판과 양들과 소들과 말들과 바다와 함께하던 아일랜드 몸의 시선이 좁은 서울 집에 갇혀 차들이 빵~을 길게도 눌러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일기를, 글을 쓴다. 인스타그램의 작은 배설들을 제외하고는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깨달음의 순간이 오면 늘 긴 일기를 쓰고는 했다. 구구절절, 혹시 작은 생각의 조각이라도 잊을까 봐. 나는 기록가이다. 어릴 적부터 쓴 일기가 서랍장 깊숙이 잔뜩 쌓여있다. 어떤 기록도 누구의 편지도 버리지 않았었다. 고딩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쓴 연습장과, 대학 때의 필기 노트, 중2병을 앓던 시절 우울과 회의의 끄적임들, 회사 다닌 날들의 일지까지 안 버렸다. 무언가를 배우고, 알고,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그 앎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간들을 즐겼다. 자주 앉아 옛 기록들을 뒤척이는데, 어제는 한국에 2년 만에 돌아와 예전 파일들을 꺼내며 진짜 별의 별게 다 있다 하고 실소를 내뿜었지만 결국 또 그것들의 한조각도 버리지 못했다. 재미있었다. 특히 내 몸과 마음의 고통과 관련하여, 그때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것들이 왜 몸으로는 일어나지 못했는지를 지금 어떤 변화의 시점에 서서 조금씩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아일랜드에서의 삶..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알렉산더 테크닉 1600시간의 트레이닝을 다 마쳤고 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마지막 학기는 무려 판데믹과 함께, 졸업식은 거리두기와 함께 지나갔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학교가 닫힌 시점.. 나의 졸업을 위해 리챠드 싸부님이 나와 남편 딱 둘만 학교에서 그와 함께 자가격리를 하며 마지막 3개월을 보내는 게 어떠냐 제안해 준 덕분이었다. 둘이서만 누리는 특훈 생활이 이어졌고, 싸부님과 매일 밤 고스돕을 치고 밥을 노나 먹고 가끔 바다 수영을 다니며 아일랜드의 마지막 3개월이 지나갔다.


마지막 학기, 어떻게 보면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중요한 시기 동안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일기를 쓰지 않는 시절의 이유는 보통 대체로 저변에 깔려있는 무기력증과 우울증 때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누가 말했었나, 알렉 학교 동료가 말해준 것처럼 귀신같게도 3학년 때는 1, 2학년 때 배웠던 것과는 받아들이는 속도와 깊이가 달라졌다. 무수한 몸과 의식의 작고 큰 깨어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언어로는 새로운 것을 탐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정의와 기존의 의식, 기존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영역, 알 수 없음의 세계로 몸과 마음이 그 있는 그대로를 열어내는 것은, 그것을 알려고 하는 순간 도망가버렸다. 알고, 예측하고, 불안하지 않음을 계획하고, 지식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습관은 알 수 없는 직관의 세계를, 현존의 감각을 자꾸만 닫아냈다. 일기를 쓰고 무언가를 말로 기록하는 순간, 넓고 무한한 어떤 세계가 단 한 개의 언어로 축약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변하면 죽는다고 ㅋㅋ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자가 격리를 핑계 삼아 또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인다. 배운 것들을 여러 방법으로 확장하며 경험하며 남기고 싶다. 무엇을 쓰게 될까. 계획하지 않고, 가보아야지.


졸업식 날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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