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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손이 Sep 16. 2022

책 있는 방은 영혼이 시끄럽다

아침 생각 No.1

Q 독서 리스트가 달랐을 것 같다.

A 한평생 눈에 띄는 대로 계통 없이 읽었다. 문학보다 역사, 기록, 보고서, 르포처럼 사실에 바탕한 책을 더 즐겨서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이 지금 나의 정신 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나의 생애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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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김훈의 인터뷰는 늘 울림을 준다. 그의 방에 책이 한 권도 없다고 해서 놀랐던 게 20년쯤 전의 일이던가. 명사들의 서재 인터뷰를 보면 한결같이 삼단 사단 그득그득한데 심지어 사다리 밟고 지붕까지 올라가 꺼내오는 책들을 보며 대단하다 멋지다 하던 시절이었는데 김훈의 장서 하이퍼_미니멀리즘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언제나 책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 살았다.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고 독서신문을 발행할 만큼 책에 열정도 있었다. 예전엔 예능도 ‘책을 읽읍시다’라는 식이었다.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신과 같다는 키케로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던 시절, ‘혹시 이게 출판사가 만든 성공한 카피?’ 하는 지금의 의혹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책에 돈을 아끼지 말자며 한번 보고 말 책도 쿨하게 사들였다. 


요즘도 서점은 나의 방앗간이나 사고 싶은 책은 많지 않다. 한 권도 고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 많다. 책들이 시끄러운 소음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고 잠깐의 독서 이후 처분에 할애하는 모든 시간이 미치도록 아깝다. 내가 모든 분야를 알 수도 없거니와 핵심은 한줄뿐인 동어반복과 변주에는 흥미가 없다. 까탈스러워진 내가 좋아하는 책은 자기 분야에 통달했으면서 문장력도 좋은 저자가 자기 영혼을 갈아 넣은 것들이고 그들의 생에서 한 두 권 정도 있는 것 같다. 노른자로만 골라 먹겠다는 내가 너무 편벽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지만 아무렴 어떠랴. 김훈처럼 0권은 아니라도 옥석을 가린 책들로만 조금 채워진 정도의 책장을 가지고 싶다. 


그러니까 요즘 나는 만사에_ 심부는 약동하는데 표피가 말라간다. 나무같이 되는 건가. 


아들의 유튜브 시청을 막는 나에게 남편은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이 생각은 안 하고 책만 많이 읽는다고 걱정했다며 내 걱정이 팔자인 것을 간파하듯 말했다. 그래도 게임 유튜버가 ‘다구리 다구리 다구리~~’ 이러는 걸 보고 앉아있는 6세 아들을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주말에만 2시간 보기로 했는데 몰래 태블릿을 꺼내와 자꾸 규칙을 어기는 아들에게 이번 주말은 아예 시청 기회를 박탈했다. 절망에 휩싸인 그 애에게 나라는 사람이 대안으로 제시한다게...


"우현아 유튜브 보고 싶으면 독서록 써서 한 권에 5분씩 벌어서 봐." 간단한 독서록 작성법을 피력하니 아들은 너무 어려워서 그냥 포기하겠다고 쿨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어제는 너무 보고 싶었는지 기를 쓰고 ‘제목; 내 사과파이 누가 먹었지? 너무 재미있었다’라고 대문짝같이 큰 글씨로 써오는 게 아닌가. "우현아 5분은 아무래도 너무 짧지? 6권이면 30분인데... 다음부턴 저자 이름도 좀 적어봐"라고 말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식 독서교육의 화신인가. 초판 발행일도 쓰라고 할판이네. 


아직은 향유할게 적은 나이니 어린이 동화책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특정 텍스트에 연연하지 않고 두루 보며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세상 모든 곳에서 사물이든 현상이든 자연이든 사람이든 낮고 깊은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거기 있는 모는 게 다 양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하고싶은 말은, 사월이든 구월이든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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