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쓰고 생각하고 No.4
요즘의 독서는 거의 '이별'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읽고 버리자며 '책장 비우기 PJT'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예전 책을 많이 보게 되는데 유행이 지난 것들도 있고 '왜 샀지?' 하는 것들도 있고 누가 준 것들도 있고 옛 시절의 나를 볼 수 있어 반갑고도 낯선 것들도 있다. 책을 처분하자니 어쩐지 아쉽고 아까운 기분이다. 과거를 반추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을 모두 남겨두는 것에도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뜻대로 지금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쉬움은 이렇게 독서기록으로 갈음할 수밖에.
대학에서 '교육학개론'수업을 처음 들을 때 교수님은 명강사였다. 아직도 그날 교수님께 처음 들은 '타블라 라사(빈 서판)'라는 용어와 목소리가 생생하다. 인간의 가소성을 믿고 방향성을 설정해 키워 내는 교육의 의미... 나는 교육학이 너무 재밌어서 부전공을 하고 싶었는데 중간에 성우가 되는 바람에 전속을 마치고 연기학을 복수 전공하느라 학점을 채울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방송대 교육학과에 편입했는데 그 무렵 '최고의 교사는 어떻게 가르치는가'이 책을 샀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마음 가짐을 가질지 등을 아주 세세하고 꼼꼼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다. 교수법에 관한 꿀팁으로 점철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최대 목표는 결국 '자아실현'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인데 나는 이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좋아했다. 거대 표본 집단을 종단적으로 연구해 '어떻게 산 사람들이 잘 살았더라' 이런 연구 결과를 알려주는 책을 특히 좋아했고 그렇게라도 '잘된 인생의 비밀'을 알고 싶어 했다. 인생 좀 알 것 같다고 폼 잡는 지금은 이런 책을 잘 사지 않지만 20대에는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런 질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을 사랑했고 '최고의 공부', 이 책도 샀다.
'최고의 공부'는 눈부신 창의성으로 자기 분야에 통달했으면서도 인생을 균형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해 그들이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내게 특히 주효했던 것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표현할 때 '시간, 공간, 색, 리듬, 무늬'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사물이나 타인을 이해할 때도 대상의 리듬이나 패턴, 색 등을 생각해 보면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것도 재밌었다. 창의성 개발 수업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단순한 차원에서도 보다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영감을 얻었다.
십 년 전 이 책을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있던 구절은 '이시도르, 오늘 선생님께 좋은 질문을 했니?'다. 연구 대상 중 한 명이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인데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뭘 배웠는지 묻지 않고 좋은 질문을 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질문만으로도 자신을 과학자가 되도록 이끌었다며 설명하는데 그 대사가 좀 멋있다고 느꼈다. 슬쩍 문장을 훔쳐다 나도 써먹어야지 하고 기억해 뒀는데 우리 딸은 부담스러우니 유치원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말라며 내 입을 막았다.
공부의 목표는 탐구를 통해 얻은 여러 아이디어를 통합해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진지한 탐구를 통해 깊게 사고한 경험으로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서 더 나은 것을 고를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니까 더 공부할 수록 더 많은 자유를 얻는 것이다. 어릴 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부를 하는 것 같아 지루해할 때 누군가 내게 이런 공부의 목적과 매력을 말해줬다면, 어쩌면 나도 '퍼뜩' 정신이 났을까? (그래도 잠은 왔을 것. ㅎㅎ) 뭐, 상관없다. 늦게라도 정신만 차리면 되는 거니까. 그쵸?
여하튼 이렇게 두 권과도 또 안녕이다. 흘린 것도 있고 주워 담지 못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쉬워도 여기까지다. 고마웠다. 책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