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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Nov 04. 2021

스탠바이 웬디

Live Long and Prosper

* 3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주인공 웬디(다코타 패닝)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보호시설에 살고 있는 자폐증 환자이다. 웬디가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웬디는 지난 몇 달간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427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를 작성했고, 이제 마감일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LA에 있는 영화사까지 제 시간에 시나리오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전달하는 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웬디는 LA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동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웬디가 LA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스코티 역의 토니 콜렛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은 보호시설 원장인 스코티(토니 콜렛)가 그녀의 아들인 샘(리버 알렉산더)에게 


“그 커크란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물어보는 장면일 것이다. 미국에선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두 주인공 커크와 스팍의 이름을 한번도 듣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박지성과 박찬호를 들어본 일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중년 여성인 스코티가 커크를 모른다는 것은 영화의 재미를 위한 설정일 뿐, 실제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 증거로 영화의 또 다른 장면, 스코티는 스타트렉의 유니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있지 않던가? 



미국인들의 <스타트렉>에 대한 애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우리는 미국인들이 <스타트렉>을 얼만큼 좋아하는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들의 왜 그토록 좋아하는지 추리 정도는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스타워즈>보다도 10년이나 먼저 제작된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간 방영된 이후 9편의 극장판 영화와 4편의 스핀오프 시리즈가 제작되었고, 현재는 최신 감각으로 리부트 된 스타트렉 시리즈가 3편까지 개봉한 상태이다. 이쯤 되면 미국에서 <스타트렉>은 고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관객이 1960년대에 제작된 오리지널 스타트렉을 지금 관람한다면 좋아하기는커녕 끝까지 시청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화면은 투박하고 분장은 유치하며 대사는 손발이 오그라든다. 왜 미국인들은 이런 골동품 같은 드라마에 아직도 열광하는 것일까?


<갤럭시 퀘스트>(1999)는 미국인들이 <스타트렉>을 얼마큼 좋아하는지 알려주는 영화이다.


미국인들이 <스타트렉>을 사랑하는 이유는 <스타트렉>이 자신들의 역사를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한 영국 출신의 이민자들은 생존을 위해 대륙의 서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들 눈 앞에 펼쳐진 미대륙은 한번도 본적없는 외계의 행성과도 같은 곳이었고, 여행 도중 마주친 원주민들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들의 이동은 낭만적인 여행이 아닌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었다. 그 이민자들은 서부 해안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고 지금 미국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이들 덕택에 미국인들은 현재 미국땅에 오래도록 살면서 (live long) 번영하고 (prosper) 있다. 외계 행성을 탐험하고 외계인과 조우하는 <스타트렉> 주인공들의 모험담은 바로 미대륙을 탐험하고 원주민과 조우하는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은유이자 미국인들을 하나로 단결시켜주는 문화적인 코드이다. 만일 1천년 후에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지도상에 존재한다면 <스타트렉>은 영화가 아닌 신화가 되어있을 것이다.   


Live Long and Prosper !


영화 속에서 웬디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트렉의 캐랙터는 스팍이다. 뾰족한 귀가 트레이드 마크인 스팍은 감정없이 논리적인 것만 추구하는 외계인이다.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스팍에게 감정이 이입된 웬디는 스타트렉을 몇 번씩 반복해서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신만의 스타트렉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웬디가 쓴 스타트렉 시나리오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스탠바이 웬디>, 이 영화와 비슷했을 것이다. LA는 목적지이고 고속도로는 우주이다. 시나리오 제출은 그녀가 달성해야 하는 미션이다. 미션을 완수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위기가 닥치지만 그녀의 곁에는 커크 선장이 없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커크 선장 없이 오로지 논리적인 것만 추구하는 스팍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스탠바이 웬디>는 스팍이 단독 주연으로 등장하는 스타트렉의 한 에피소드와도 같은 영화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돌파하는 웬디를 지켜보며 그녀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모두 넘기 어려운 자신만의 한계를 안고 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약간의 자폐를 안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어떤 사람은 동물의 내장으로 요리한 음식은 먹지 못한다. 외국인 배우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고 남북 통일을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는 새로움을 다루는 방식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을 멈추고 스스로 자폐를 선택한다. 10대 가출 소녀 같은 웬디에게 남녀노소 모든 관객들이 감정이입이 되는 이유이다.


웬디의 가방에 들어있던 시나리오 원고들이 공중에서 날릴 때, 관객들은 미션이 실패라고 단정짓고 웬디보다 먼저 포기한다. 하지만 웬디는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방법으로 해결책을 고안해 낸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웬디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공감은 어느새 존경으로 바뀐다. 과연 나는 남의 도움 없이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리고 나에겐 이토록 절실하게 이루고 싶은 일이 있는가? 



나는 이 영화를 지금 눈 앞에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 <스타트렉>을 잘 알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스탠바이 웬디>는 잠시나마 당신에게 위로와 의욕을 선물할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조금 더 잘 해보자. 영화를 보며 웬디와 함께 LA에 다녀온듯한 피로감은 덤이다.


<아이앰 샘>의 귀여운 소녀 다코타 패닝, 잘 자라 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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