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일 Oct 29. 2021

쓰리 빌보드

분노를 다스리는 법

3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영화의 베경은 "Ebbing"이라는 가상의 마을이다.


<쓰리 빌보드>란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난 후, 나는 이 영화가 무능한 경찰을 대신하여 딸의 살인범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복수극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는 추리 스릴러도 아니고 복수극도 아니다. 영화는 ‘에빙(Ebbing)’이라는 지명의 소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딸의 살인범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눈 살인범에게 똑같이 되갚아 줌으로써 분노를 해소하고 싶건만 살인범이 누군지 알 수 없기에 분노의 감정만 쌓여간다. 결국 그녀의 분노는 전염병처럼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평화롭던 에빙은 분노로 가득찬 마을이 되어버린다.



액션 영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의명분은 복수이다. 자녀를 잃은 부모의 복수, 연인을 잃은 남자의 복수, 사부를 잃은 제자의 복수극은 관객들에게 쉽게 공감 받는다. 주인공과 함께 분노한 관객들은 주인공의 폭력을 정당화된다. 어린 딸 1명에 대한 복수는 성인 남성 10명 이상에게 전파된다. 관객은 주인공의 보복에 환호하고 오히려 더 자극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복수가 빨리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 


분노는 인내심이 없다. 즉각 해소되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문명 국가는 사법 시스템을 만들어 개인적 복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악당이 벌을 받기 위해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리는 것은 분노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다. 빨리 해소되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전염되기 시작한다. 복수할 대상을 마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영화 <쓰리 빌보드>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주인공 밀드레드는 터질듯한 분노로 가득찬 상태로 영화에 등장한다. 딸의 살인범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표를 잃은 밀드레드의 분노는 에빙시의 경찰서장인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향한다. 그녀는 에빙시 외곽 도로 주변의 대형 빌보드를 대여하여 윌러비 서장을 비난하는 광고를 올린다. 빨간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범인을 아직 잡지 못한 경찰 서장을 비난하는 빌보드 광고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다. 



경찰서장이 무능하여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이 불편한 광고는 경찰서장 본인은 물론 서장의 가족들과 서장을 존경하는 마을 주민들까지 분노하게 만든다. 이 광고 때문에 밀드레드는 주민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 서장은 밀드레드에게 광고를 내려달라고 부탁하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자신의 청탁이 무시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서장은 밀드레드에게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복수한다. 서장을 사랑하는 부하직원 딕슨(샘 록웰)은 서장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광고사 대표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세 개의 빌보드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누군가는 빌보드에 불을 지르고, 빌보드에 불을 지른 사람이 경찰이라고 오해한 밀드레드는 다시 경찰서에 불을 지른다. 분노는 이처럼 논리적이지도 않고 참을성도 없다. 사람이 비이성적인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분노 때문이다. 


밀드레드도 빌보드의 광고 때문에 범인이 더 빨리 잡히리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랬을 뿐이다. 해소되지 않는 분노는 점점 더 무서운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방화는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이다.


분노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은 소도시 조차도 한 사람의 분노로 인하여 위험한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 <쓰리 빌보드>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분노 해소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남들에게 알리고, 그것에 대해 사과받고 공감받으면 된다. 영화 속 윌러비 서장은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윌러비는 눈앞에 닥친 자신의 문제 때문에 밀드레드의 분노에 공감하고 사과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녀의 분노에 공감해주지 못한 것. 그것이 에빙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영화를 봤다면 잘못된 분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빨리 전염되고 불행을 가져다 주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도 잘못된 분노로 인하여 잘못된 장소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영화는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분노를 이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이다. 정당한 분노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오래된 나의 믿음 중 하나이다.


 



 





작가의 이전글 양자경 예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