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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Nov 22. 2021

휘트니

스타, 그 평범함의 어려움

* 3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나는 휘트니 휴스턴과 동시대를 살았고, 휘트니 휴스턴의 히트곡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팬은 아니었다. 

휘트니가 최전성기였던 80년대 말, 나는 그녀보다는 폴라 압둘(Paula Abdul)의 Straight up을 더 좋아했고, 데비 깁슨(Debbie Gibson)의 Out of the Blue나 티파니(Tiffany)의 Radio Romance를 더 즐겨 들었다. 비슷한 시기의 여성 그룹 뱅글스(Bangles)의 이터널 플레임(Eternal Flame)은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팝송 중 하나이고, 마돈나(Madonna)에 열광하여 우리 나라엔 개봉하지 않았던 마돈나 출연작인 <비전 퀘스트(Vision Quest)>의 불법 비디오를 구하기 온 동네의 비디오 가게들을 돌아다녔던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이들은 모두 ‘비디오형’ 가수들이었다. 



1980년대 초, MTV의 탄생과 함께 팝음악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게 되자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는 노래만큼이나 중요해졌다. 특히 여성 가수는 가창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예쁘고 날씬하지 않으면 데뷔하기조차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여성 가수가 성공하기 위해 가창력만큼이나 외모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MTV 탄생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1985년에 데뷔한 휘트니 휴스턴은 아마도 오디오 시대의 마지막 가수였을 것이다. 신이 내린듯한 목소리를 지녔고 어렸을 때부터 직업 가수였던 어머니에게 트레이닝을 받았던 휘트니는 동시대 팝스타들 중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였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휘트니 휴스턴 역시 여러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지만 그녀의 노래를 능가하는 뮤직비디오는 떠오르지 않는다. 휘트니 휴스턴에게는 마이클 잭슨의 드릴러나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히트 뮤직비디오가 없다. 가수의 본질은 가창력에 있다고 믿고 있던 그녀가 폴라 압둘이나 자넷 잭슨과 같은 가수들을 얕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흘러 1990년 말이 되자, 데비 깁슨과 티파니는 사라졌고, 폴라 압둘은 원로 가수가 되었다.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만은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갔다. 머라이어 캐리와 듀엣으로 부른 “When You Believe”란 노래가 “I will always love you”만큼이나 사랑을 받았던 것이 1998년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198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스타들이 혜성처럼 잊혀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휘트니의 내리막길은 너무도 길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휘트니가 이 세상을 떠난지 6년이나 지났건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녀의 몰락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TV를 통해 반복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파파라치들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갔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기행처럼 포장되어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특히 그녀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대중들은 스포츠 중계를 보듯 그녀의 사생활을 지켜봤다. 때마침 인터넷이라는 것이 집집마다 보급되었다.



무대에서 기행을 일삼는 마돈나의 사생활은 오히려 비밀스러웠던 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휘트니 휴스턴의 사생활이 이처럼 낱낱이 공개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디오 가수로서 비디오의 위력을 잘 몰랐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중들에게 늘 관심받고 싶었던 휘트니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대중들에게 비난받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다른 수많은 스타들처럼 어느 순간부터 대중들은 휘트니를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중의 무관심이 두려웠던 휘트니는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도 콘서트를 강행했고, 스캔들 후에도 자숙하지 못했다. 스타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대중의 욕망과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을 원하는 휘트니의 욕망이 마주치면서 그녀의 일상은 생중계가 되었고,  그녀가 마약 중독의 노숙자의 몰골로 변할 때까지도 중계는 멈추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는 그녀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대체 불가능한 스타를 불행한 죽음으로 이끈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는 휘트니 생전에 가까웠던 지인들, 특히 가족들의 인터뷰를 보여주지만 그들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들 모두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휘트니의 어머니는 교회 목사와 외도를 하여 가정을 깼고 어느 순간부터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성실한 가정처럼 보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휘트니가 가장 신뢰하던 에이전트를 쫓아낸 후 그녀와의 거액의 소송을 진행했다. 휘트니는 그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가장 나쁜 사람들로 지목된 그녀의 오빠들은 휘트니에게 마약을 소개했고, 휘트니 휴스턴의 오빠라는 지위를 누리기 위해 휘트니로 하여금 중독 치료 받을 시기를 놓치지 만들었다. 그녀의 오빠들이 이제껏 그녀의 전 남편인 바비 브라운보다 비난을 덜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등장한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은 휘트니를 아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들은 마치 프로이드를 공부한 심리 상담사들처럼 그녀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의 탓으로 돌린다. 따뜻한 가족 다큐처럼 시작한 영화는 어느새 서로 상반된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거짓말 경연장이 되어 버리지만 그들 중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판정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휘트니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케빈 맥도날드는 인터뷰에 대한 진위를 가리지 않음으로써 그들 모두를 비난한다. 오로지 좋았던 시절만 기억하면서 그녀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들에게 떠넘기려는 부모, 남편, 형제, 가까운 지인들까지 모두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저야 할 사람이다. 


그녀의 일상을 뉴스처럼 소비한 대중들은 과연 아무 잘못이 없을까? 나 역시 무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그녀에 대한 뉴스를 소비하며 살았다. 그녀의 말실수와 동료 가수들에 대한 뒷담화, 전국 노래자랑 수준의 콘서트, 그리고 몰락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노숙자 몰골의 사진은 늘 나의 컴퓨터까지 도착하였다. 인터넷과 경쟁하기 위한 공중파도 그녀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를 쏟아내었고 결국 그 피해는 모두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다.

많은 스타들처럼 그녀 역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평범함’의 기준은 사람들마다 다르지만, 영화를 본다면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함이라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 


한 때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지구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그녀가 죽기 전에 가장 바랬던 것들이 이미 내가 오래전 부터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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