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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Nov 29. 2021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삶, 그 끊김없는 드라마

* 3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좀비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관람할 생각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어간 헐리웃의 블록버스터 좀비 영화를 보고도 만족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일본의 저예산 좀비 영화라니, 대체 누가 이딴 영화를 보고 싶어할 것인가?


그러던 중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가 일본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후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씨네큐브 티켓이 생긴 덕택에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부산행만큼 재미있을까?’라는 의문이 ‘과연 끝까지 볼 수 있을까?’라는 우려로 바뀌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초반 30분은 돈을 받고 상영해선 안 되는 수준의 영화였다.

고상하게 영화의 주제나 배우들의 감정선 같은 것을 비평할 필요도 없다.

대사는 말도 안되고 좀비들의 분장과 연기는 지켜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너무 수준 이하라서 관객들까지도 창피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배우의 뒤통수를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어 버리고, 배우들은 카메라에 대고 직접 대사를 하기도 한다. 대학교 영화 동호회에서 습작으로 만든 수준의 영화가 왜 일본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까?



몇 번이나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화는 30분만에 끝나 버린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너무 짧은 러닝타임이 이상했다.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초반 30분은 앞으로 주인공들이 만들어야 할 영화 속의 영화였던 것이다. 영화는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제목 타이틀을 보여준다.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좀비가 나오는 공포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좀비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그린 코메디 영화이다. 완성된 영화를 먼저 보여준 후 한달 전 과거로 돌아가 그 영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발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히구라시(하마츠 타카유키)는 방송국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방송을 제작하는 방송 연출자이다. 그는 훌륭하지는 않지만 남들보다 싸고 빠르게 방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히구라시에게 일본의 한 케이블 방송사가 원테이크짜리 생방송 좀비 드라마의 제작을 의뢰한다. 좀비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만든다는 기획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연출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히라구시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오합지졸 배우들과 함께 방송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생방송이 시작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과연 이 드라마는 성공적으로 끝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를 재밌게 만들어주는 여러가지 풍자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갑을관계에 대한 풍자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에는 좀비 드라마를 반드시 원테이크의 생방송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거대한 대의명분은 등장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끊길 경우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테러리스트의 위협 같은 것도 없고, 주인공 가족이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도 아니다. 직업이 방송 연출자인 주인공에게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있었을 뿐이다. 생사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절박함에 공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직장을 다녀봤거나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본질을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란 직장 상사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객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광고주나 시청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국민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장사꾼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팔아야만 살 수 있고, 인기 아이돌 스타도 팬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한다.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요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찰도, 정치인도, 좀비 드라마의 연출자도 매일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우리는 그 미션을 ‘삶’이라 부른다.



아무 준비나 사전 정보없이 관람했던 영화의 첫 30분은 난장판처럼 보였다.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원테이크라는 어려운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카메라에 묻은 피를 닦아가며 촬영된 영화를 보며 좋아할 순 없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삶을 엿보고 나면 영화를 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방송 연출자라로서의 삶은 방송국의 요구대로 방송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영화는 다르게 보인다. 처음엔 어처구니 없던 각 장면들에 의미가 부여되면서 이 난장판 같던 영화는 올해 최고의 코메디로 변신한다. 유쾌한 반전이다.



주인공에게 좀비 드라마는 평생에 한 번 만들어보고 싶던 걸작이 아니라 매일 만들어야만 하는  방송 중 한 편에 불과했을 것이다. 매일매일 발생하는 크고 작은 미션들 중 하나이다. 너무 이상한 일이지만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뛰고 굴러야만 한다. 직업이란 그런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단지 몸개그를 보여주며 값 싼 웃음을 주는 유도하는 영화는 아니다. 삶을 이해하는 관객들이 주인공들을 응원하면서 함께 웃는 웃음이고 그 웃음의 강도는 매우 강하다. 삶의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공감하게 될 것이고 공감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희열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영화 덕택에 이번 달에 한 번 정도는 직장상사나 고객의 트집을 한 번 정도는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을 땐 남들도 나와 똑같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상관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문을 한 번 외워보자.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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