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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Dec 01. 2022

필름스타 인 리버풀

글로리아 그레이엄을 기리며

* 4년 전 기고했던 글 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다시 제 공간에 업로드 합니다.



<필름 스타 인 리버풀>은 글로리아 그레이엄이란 실존 여배우의 생애 마지막 3년 간의 이야기이다. 

1923년 생인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필름 느와르 시대의 스타이면서 아카데미상 수상 경력이 있는 여배우이기도 하다. 모든 여배우들이 동경하던 꽃길을 너무 젊은 나이에 지나쳐버린 그녀의 중년 이후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4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은 모두 전 남편들이 가져갔다. 어린 남성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은 늘 대중들의 구설수에 올랐는데, 그 정점은 그녀의 마지막 남편이 그녀의 첫 번째 남편과 전부인 사이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더 이상 메이저 영화에 출연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져갔다. 지금도 물론이지만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70년대말에도 글로리아 그레이엄이란 배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의 중년 팬들 뿐이었다. 



글로리아 그레이엄이 철없는 여성의 전형이라면 1957년 생인 아네트 베닝은 철든 여성의 전형이다. 아네트 베닝에 대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은 ‘현명함’이다. 많은 영화 속에서 아네트 베닝은 상대방을 옮은 길로 인도하는 현명한 여성의 역할을 맡는다. 



활짝 웃는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아네트 베닝은 팜므파탈 글로리아 그레이엄과 전혀 닮지 않았다. 연하의 남성을 좋아했던 글로리아와는 달리 아네트 베닝는 20년 연상의 스타 배우인 워렌 비티와 결혼했다. 헐리웃에서도 알아주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워렌 비티는 아네트에게 반하여 먼저 청혼했고 아네트는 결혼과 동시에 워렌 비티의 오랜 바람둥이 생활을 청산하도록 만들었다. 세기의 대스타 배우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네트는 남편의 그늘 안에 안주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만들어왔고, 늘 그녀의 최근 작을 그녀의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둘은 수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26년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글로리아와 아네트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네 자녀가 있다는 것인데 아네트와는 달리 글로리아의 네 자녀는 아버지가 모두 다르다. 



아네트 베닝과 그녀의 남편인 워렌 비티(좌). 여성 편력이 유명한 배우였고, 결혼 전 마지막 애인은 같은 급수였던 마돈나였다.

삶은 물론 외모 조차도 닮지 않은 아네트 베닝이 <필름스타 인 리버풀>에서 글로리아 그레이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린 남성을 유혹하고 싶어하는 나이 든 여성의 역할은 아네트 베닝보단 샤론 스톤이나 마돈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 베닝이 글로리아 그레이엄의 역할을 멋지게 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말년의 글로리아가 단지 노인의 몸에 갇힌 철부지 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현명함을 지닌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성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사회와 타협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감추지 않았다. 스타이기 전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였고, 마르지 않는 연예 세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배우란 본업을 위해 암치료까지 포기했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철들었다는 말은 칭찬이고, 철부지란 말은 비난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철들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남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최초에 내가 좋아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린 상태가 철이 든 상태이다.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로서는 철들지 않는 것이 철드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서도 철들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현명함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만일 글로리아 그레이엄이란 배우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평생 철들지 않았던 그녀에 대한 질투심 때문일것이다. 그녀가 평생 무대를 사랑하고 남성들과 연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배우 아네트 베닝은 이런 현명하지만 철이 들이 않은 아주 기묘한 상태의 여성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아네트 베닝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1957년 생인 그녀가 전 모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러브 어페어>(1992) 이후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녀가 연기한 50대의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질만한 여성이었다.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 두 남녀의 나이 차는 스토리 전개 상 별 갈등을 유도하지 않고 주변 인물들조차도 – 심지어 남자 주인공의 엄마조차 - 이 둘의 사랑을 비난하지 않는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이 둘의 나이차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아네트 베팅의 멋진 연기 덕택이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자신의 연예세포가 죽어가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일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 늘 다시 찾아보고 싶은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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