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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Dec 03. 2022

일일시호일

키키 키린을 기리며

* 4년전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란 제목의 일본 영화가 개봉되었다. 중학교만 졸업했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한자 제목이지만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일일시호일>의 원작이 된 수필집의 국내 출판 제목을 보면 된다. <매일 매일 좋은 날>. 영어 제목은 <Everyday A Good Day> 이다.


<일일시호일>은 많은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공간의 이동이 적고 영화의 호흡은 매우 느리다. 움직임이 많은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일일시호일>이 지루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관람할 경우 그 여운은 아주 짙고 길게 남는다. 



<일일시호일>은 일본식 다도(茶道)를 배우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이다. 다도 초보자인 노리코(쿠로키 하루)가 다도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식 다다미 방에서 다도를 배우는 장면들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취업 준비생 노리코는 그녀의 사촌 미치코(타베 미카코)와 함께 다도를 배우게 된다. 그 후 노리코는 다도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훌라걸스> 중


초보자들이 생소한 분야에 도전한다는 영화는 일본 영화 특유의 감성 중 하나이다. 우리 나라 관객들이 좋아하는 일본 영화 중에는 이러한 초보자들의 도전기가 많은데, <쉘 위 댄스>(1996)는 평범한 직장인의 볼룸 댄스 도전기이고, <훌라 걸스>(2007)는 탄광촌 여고생의 훌라춤 도전기이다. 이 밖에도 <으라차차 스모부>(1992), <워터 보이스>(2002), <스윙 걸스>(2004)와 같은 영화들이 초보자가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는 것이 영화에 소재이고, 생소한 분야에 도전일수록 영화는 더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런 영화들은 내용과 감성이 비슷하다. 하나의 장르로 분류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일일시호일>의 경우 주인공이 다도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 일본식 도전 영화들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감성 때문에 같은 장르로 분류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도전 영화들의 경우, 주인공들은 도전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무대를 향한 질주를 시작한다. 짧은 시간 안에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늘 수많은 관객들이 모여있는 무대이고 주인공들은 무대 위에서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모든 갈등을 폭발시키듯이 해소시킨다.


반면 <일일시호일>에는 이러한 감정적인 질주가 담겨있지 않다. 노리코는 24년 간 다도를 배우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다도 실력을 뽐낼 수 있는 무대는 없다. 노리코의 일상은 다도와 구분되어 있기에 노리코가 겪게 되는 슬픈 사건들 중 다도와 연관된 것은 없다. 다도는 슬픔을 더 빨리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노리코가 겪는 취업, 연예, 가족 문제는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들이다. 영화의 소재로는 부적합한, 아주 평범한 문제 같지만 이 문제들이 현실의 나에게 닥칠 땐 1분 1초를 견뎌내기 힘든 아픔이 되기도 한다. 간혹 친구가 성공했을 땐 친구의 성공이 자신의 실패와 비교되는 것 같아 좌절한다. 거의 예외 없이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일이고, 이런 아픔을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늘 떨어진 직장에 내일 합격할 가능성은 없으며 오늘 겪은 실연의 상처를 내일까지 완치시킬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시간이다.

노리코에게 다도란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다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도 있다. 서양 심리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동양에서는 이미 다도라는 의식을 통해 몇 세기 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도 선생님인 다케타(키키 키린) 역시 다른 일본의 도전 영화나 무협 영화에 등장하는 스승들과 많이 다르다. 다케타는 제자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 

혹독한 훈련이란 짧은 시간 안에 최대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꼴찌팀이 올 해 안에 우승해야 한다면 혹독한 훈련을 시켜 줄 스승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20년 넘도록 배우고 익히기 위해선 다른 지도 방법을 써야 한다. 

다케타의 지도 방법은 편안하다. 제자들이 실수하면 같이 웃어주고, 틀린 것을 바로 잡아 준다. 무엇보다 제자들과 함께 차를 같이 마시고 담소를 나눈다. ‘스승’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그 어떤 사람의 모습도 다케타의 이미지와 중첩되지 않는다. 그런 다케타의 지도 방식 덕택에 다도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것이 되고, 시간은 어느 새 24년이나 지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노리코는 여전히 다도를 배우는 중이고 여전히 일상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노리코에게 다케다는 이제부터 다도를 가르쳐 보라고 권유한다. 관객들도 노리코가 다도를 가르칠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 공감은 노리코의 인생이 지금부터 새로 시작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든다.  

이 영화는 매일 매일 반복해도 즐거운 무엇인가를 이미 발견한 사람이라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거나 무대에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나를 위해 꾸준히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일본의 국민배우였던 키키 키린의 유작이기도 하다. 마치 현실의 그녀가 영화 속의 다케다가 되어 관객들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것 같기에 영화의 여운은 더 길게 남는다. 


故 키키 키린 (1943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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