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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Sep 05. 2018

뉴스과잉 시대의 저널리즘

북저널리즘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를 읽고

부모님은 아직 신문을 구독하신다. 두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시고 종종 스포츠 신문이 함께 배달된다.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다. 가끔 필요에 의해 학교에 비치된 무료 신문 한 부를 집어 오기도 했지만 그 필요가 '읽기 위함' 보다는 생활적인 것(이를테면 이사라든지)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거의 10년간 종이 신문을 거의 읽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종이 신문을 읽지 않아도 뉴스가 넘치는 시대다.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것이 뉴스다. 형태 또한 다양해서 온라인에만 접속하면 같은 내용이라도 언론사에 따라, 플랫폼에 따라 다른 콘텐츠를 볼 수 있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블로그에 뉴스 내용을 간추린 포스팅을 잔뜩 찾을 수 있다. 공급은 넘쳐나지만 돈을 주고 뉴스를 사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이대로라면 종이 신문은 도서관에 가서야 볼 수 있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제와 어울리게 디지털 콘텐츠로 읽게 되었다



뉴스의 독자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는 작금의 시대에 저널리즘이 가진 고민을 토대로 저널리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새로운 것은 반나절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시대에서 저널리즘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날씨 뉴스마저 실시간으로 블로그를 통해 재생산되는 시점에서 저널리즘의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저자는 저널리즘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과거) 시민들이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행위
(현재) 시민으로서 소비자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뢰 있는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체의 행위


저자는 이 변화가 다소 수동적이던 수용자의 역할이 '시민'과 '소비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게 되면서 나타났다고 해석한다. 덧붙이자면 수용자의 선택 영역은 무척 넓어졌다. 과거는 수용자가 어떤 언론사의 글을 선택할까를 고민하던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수용자가 유튜브, 넷플릭스, 웹툰, 웹소설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와 저널리즘을 같은 선택의 범주에 놓고 어떤 것에 시간을 쓸까를 고민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콘텐츠의 형태가 다양해질수록 저널리즘의 경쟁자는 많아지고 저널리즘은 또한 변화를 요구받는다. 저널리즘의 입장에선 앞서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변화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유럽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매사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앙과 전통, 경험, 격언, 그리고 습관적인 생각은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치나 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견해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에 반해 오늘날 평균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예전만큼 경청하지 않는다.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이미 갖고 있는데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들을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판결하며 결정할 때이다 - 본문 중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인용


어쩌면 독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에서 너무 당연히 '대중'이라고 생각했던 범주 자체가 무너져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시대에 따라 '대중'의 의미 또한 변해왔다. 근대사회에선 정치 사회적 집단으로 정의 되다가 19세기, 20세기를 걸치면서 수량적 다수의 집단으로 그 의미가 변화했고 플랫폼과 콘텐츠가 다각화되고 개인 맞춤형 알고리즘 등에 의해 다시 '대중'의 의미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저널리즘에도 미래가 있을까?

수익은 생존과 직결된다. 언론사가 광고를 통해 벌어들이던 수익은 급격히 감소했고 어떤 기업도 불특정 다수에게 광고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SNS 플랫폼에서 정확히 수익을 낼만한 타겟층을 찾아 광고를 하고 싶어 하며 단순한 흥미를 보이는 소비자가 아니라 실제 '돈'을 쓰는 소비자를 가려내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전처럼 '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을 움직이지 않고,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불편한 신문의 플랫폼에 익숙해질 필요도 없다. 저널리즘 콘텐츠에 걸맞은 수익모델이 없으면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다.


결론 먼저 말하자면 아직 저널리즘의 종말을 논하기는 이르다. 저널리즘이 시도할 수 있는 실험 영역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실험을 진행 중이고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책에서는 시대적 흐름이나 저널리즘의 유형에 따라 재미있는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한다.


BBC는 오디오 시대를 맞아 토킹 위드 머신(Talking with Machine) 연구 프로젝트를 출범했다
NPR은 AI스피커에 최적화된 오디오 콘텐츠 개발을 고민한다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는 아크(Arc)라는 CMS 소프트웨어를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
버즈피드(Buzzfeed)는 제공한 레시피를 편리하게 요리할 수 있는 조리기구를 만들어 판다
프로퍼블리카(ProPublica)는 비영리 저널리즘으로 오픈소스 저널리즘 생태계를 구축해간다


언론사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오디오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고민한다. 콘텐츠와 함께 물건을 팔기도 하고 하드웨어와의 결합을 통해 독점적인 콘텐츠 배포를 시도하기도 한다. 비영리 저널리즘을 생태계를 만들어 오픈소스 저널리즘을 실현하기도 한다. 수익 때문이다. 언론사의 이런 도전은 수익의 근원이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과거의 소비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하고 지갑을 여는 소비자에게 있음을 자각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저널리즘에 대한 사용자 경험을 중요시할 때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보일 것임을 강조한다.



오늘날 저널리즘은 무엇인가?


수용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


저자는 위기에 빠진 저널리즘을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위의 두 가지를 제안한다. 또 전자가 소비자에게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라면 후자는 수용자와의 교감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덧붙인다. 여기서 문득 질문이 생긴다. 저널리즘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일까?


저널리즘의 보편적인 정의는 '정보를 생산하고 평가하며 유통하고 전달하는 일체의 행위'지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맥락 안에서 수없는 변화를 겪어왔다. 언뜻 시의성 있는 정보를 가공하고 제공하는 고유의 영역처럼 보이는 저널리즘은 '시의성'과 '가치 있는 정보'를 다룬다는 점에서 결코 고유의 영역이 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한 온라인 시대에서 SNS를 통해 끝도 없이 오가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일방적인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초기의 많은 언론사가 그랬던 것처럼 종이 신문의 내용을 단순히 온라인 플랫폼에 올린 뒤 '디지털 콘텐츠'라고 명명하는 것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사용자들은 아주 쉽게 SNS 콘텐츠에 적응했고 빠르게 재생산 해왔다. 반면 저널리즘은 기존의 틀을 버리지 못해 조금은 어렵고,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였을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위기에 처한 저널리즘을 구하기 위해서는 언론사들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지 기술적 변화에 따른 사용 양상이나 트렌디한 콘텐츠 형태를 말하는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용자에게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게 되면 저널리즘이 플랫폼을 만드는 것도, 하드웨어를 파는 것도, 오디오 콘텐츠에 집중하는 것도, 콘텐츠와 관련된 잡화를 파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수용자는 '편리한 경험'이었다, '필요한 기능'이었다며 마음을 열고 지갑을 열게 될 것이다.



나는 왜 북저널리즘을 읽는가?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북저널리즘 시리즈를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북저널리즘을 처음 읽게 된 것은 필요한 최신 정보를 집약적으로 읽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만난 책이 <차이나 핀테크>였고 이후 북저널리즘을 발행하는 출판사 스리체어스의 친한 친구, 체어메이트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북저널리즘 시리즈를 읽어왔다. 북저널리즘 시리즈는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주제를 완결성 있게 책으로 엮어낸다. 어떤 콘텐츠는 함께 읽을 때 더욱 깊이 있게 즐길 수 있고(차이나 핀테크와 미래도시 선전, 여성은 어떻게 출산에서 소외되는가와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넷플릭스 하다와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블루보틀에 다녀왔습니다와 WHY YC 등) 어떤 콘텐츠는 거스를 수 없는 SNS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신선한 주제(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말하다 등)를 다룬다.


북저널리즘 시리즈는 20대에서 40대가 깊이 고민하는 부분을 흥미로운 제도, 현안, 공간 등과 연결해 풀어낸다. 어떤 콘텐츠는 마치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앉은자리에서 몰입해 읽을 수도 있다. 시의성 있는 글을 읽다보면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부족으로 저자가 한정적이다. 따라서 저자의 역량에 따라 콘텐츠의 질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북저널리즘은 전 과정에서 에디터의 역할을 강화해 콘텐츠의 질을 상향 평준화시킨다. 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시간이 아깝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신뢰가 아마도 지속적으로 북저널리즘 시리즈를 구매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북저널리즘의 웹 페이지 화면 (썸네일)


콘텐츠에 대한 신뢰를 가질 무렵 북저널리즘 콘텐츠를 디지털 플랫폼에서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북저널리즘 시리즈를 디지털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텍스트 크기와 백그라운드 색상(흰색, 검은색, 살구색) 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처음 론칭되었을 때 불편하다고 느낀 UI나 필요하다고 생각한 기능이 비교적 금세 추가되는 것을 보며 그들이 리디북스나 교보문고, 알라딘 등에 ebook을 판매하지 않고 자체 플랫폼을 론칭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를 통해 북저널리즘은 단순히 콘텐츠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읽는 전 과정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북저널리즘의 모바일 페이지 (늘 흰색 배경에 검정 글씨를 읽다가 살구색 배경으로 변경해보았다)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의 저자가 지적한 바처럼 독자가 사라졌다기보다 독자와의 소통을 멈춘 저널리즘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북저널리즘 시리즈는 꽤 용감하고 현명하게 독자를 찾아 나선 사례가 아닐까. 또 저널리즘의 노력과 더불어 독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부족하나마 글로 나누는 것도 우리가 누릴 질 높은 저널리즘에 도움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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