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리뷰
속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배우 라인업과 포스터에서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영화였다. 문제는 영화를 보던 당시에는 괜찮다고, 심지어 재밌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볼 당시에 좋았으면 된 거지 굳이 속았다고 표현할 것은 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낚인 기분은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다.
우선, 금세 휘발될 것 같은 불안감에 줄거리를 살짝 적어보겠다. 약간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볼 사람이라면 영화를 다 본 뒤에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워킹맘 에밀리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스테파니와 친구가 되면서 시작된다. 스테파니는 남편과 일찍 사별했지만 긍정적인 에너지로 육아와 살림 팁을 브이로그로 방송하는 의욕 넘치는 전업주부고, 에밀리는 회사에서는 최고로 인정받고 매력적인 남편과 함께 근사한 집에 살지만 지나치게 거칠고 육아와 살림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함께 대낮에 독한 마티니를 마시게 된 건 스테파니 아들과 에밀리 아들이 친한 친구가 되면서부터다.
독한 마티니가 한 잔 두 잔 오가고 가슴속에 묻어둔 솔직한 심정을 공개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같은 반 학부모들의 우려대로 에밀리의 부탁으로 스테파니가 에밀리의 아들을 픽업하는 상황이 점점 더 자주 발생하게 된다. 잠시 아이를 맡아달라던 에밀리의 사소한 부탁은 에밀리의 실종과 함께 전혀 사소하지 않은 사건이 된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아들을 맡고 있는 장본인으로 에밀리의 남편에게 연락을 취하고 에밀리 남편을 도와 에밀리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계속 에밀리와의 통화를 시도하고, 자신의 육아/살림 팁 브이로그에서 에밀리의 실종을 언급하며 시청자들에게 친구를 찾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친구에게 아이를 맡기고 사라진 에밀리의 실종사건이 브이로그에 방송되면서 스테파니의 브이로그는 큰 관심을 끌게 되고, 에밀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스테파니의 브이로그는 더욱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평소의 넓은 오지랖을 보여주듯 스테파니는 적극적으로 에밀리의 남편과 아이를 보살피면서 점점 사건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한편,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아들에게 에밀리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에밀리 남편과 한 집살이를 시작한 이후 에밀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 된다.
에밀리 사망사건은 에밀리가 사망하기 직전 최대치로 올려놓은 보험금 액수 때문에 경찰과 보험사의 관심을 끌게 된다. 에밀리 남편과 한 집살이를 시작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진 스테파니는 본격적으로 에밀리의 과거 행적을 쫓게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에밀리의 과거를 마주하게 된다.
우선 죽은 에밀리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는 것, 과거에 에밀리 쌍둥이가 집에 방화를 저지르고 도망친 뒤로 실종되었다는 것, 한때 누군가의 인생을 훔쳐 잠적한 장본인이었다는 것, 가보로 받았다는 반지가 사실 시어머니에게 훔친 반지라는 것 등 에밀리의 거짓말이 발견되자 스테파니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스테파니가 에밀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차렸을 즈음 시체로 발견되었던 에밀리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리고 경찰서로 찾아가 보험금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자백한다. 남편은 한순간에 보험금 때문에 아내를 죽이고, 아내의 친구와 바람난 나쁜 남자로 전락하게 된다.
스테파니와 에밀리가 어느 정도 친해졌을 무렵, 스테파니가 에밀리의 사진을 찍자 에밀리는 정색을 하면서 싫어한다. 스테파니는 에밀리가 능력 있는 셀럽이기 때문에 사생활에 예민하다고 생각하며 넘기지만 에밀리의 과거가 밝혀지면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테파니는 그런 에밀리의 모든 것을 브이로그를 통해 온 세상에 공개한다. 실종과 죽음 그리고 돌아온 에밀리를 생중계하면서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진실을 찾아간다. 진실을 왜곡하고 숨겨온 에밀리는 스테파니에게 위협감을 느끼고 스테파니와 자신의 남편을 처리하고 싶어 한다. 마티니를 마시며 털어놓았던 우정의 증표들은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로 변질되며 갈등을 심화시킨다.
영화의 분위기는 스테파니가 브이로그를 하는 걸 제외하면 10년 전 영화의 느낌이 난다. 10년 전쯤에 개봉을 했다면 확실히 세련된 스릴러로 평가받았으리라. 유명 여성 의류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에밀리의 의상이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인위적으로 미스테릭 하고 와일드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느낌이 든 것도 약간의 실망 포인트가 되었다.
시작은 사소한 부탁이 아니었다
줄거리를 돌아보니 아이를 픽업하고 케어해달라는 부탁은 전혀 작은 부탁이 아니며, 평소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에밀리가 극의 후반 어설프게 보이는 모성애도 불필요해 보였다.
내 친구 에밀리가 실종됐어요
처음엔 에밀리의 죽음이 스테파니와 큰 연관이 된 줄 착각했고, 브이로그를 통해 에밀리를 언급하는 건 알리바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느껴지던 갈등의 징조는 사라지고 스테파니의 일방적인 추격이 길게 이어지자 의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결말에서는 그 의문 모두가 해소되지 않았다.
죽은 에밀리가 돌아왔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건 스테파니가 왜 에밀리의 행적을 쫓으며 때아닌 탐정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평범한 전업주부지만 자신에게 닥친 사건 덕에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것처럼 연출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니 에밀리의 남편도 아닌 친구 스테파니가 왜 사건의 키를 잡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며 스토리 개연성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매력 있는 건 금기시된 사항을 호기심 때문에 어긴 누군가에게 상상 이상의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여겨졌던 어떤 사건이 평범한 주인공과 만나 새로운 자극을 주리라 기대했는데 평범했던 주인공이 갑자기 셜록 뺨치는 캐릭터로 변형되어 활약하니 영화를 볼 당시에는 시원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니 허무감이 느껴졌다.
큰 기대를 하고 보지 않는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연말에 연인, 친구와 함께 보기 좋은 영화지만 새로운 스릴러 장르에 대한 기대를 하고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갑자기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가 보고 싶을지도 모르고 "맘 한 명을 건드리는 건, 맘 전체를 건드리는 거야"라는 전혀 생뚱맞은 인물의 막간 대사가 명대사처럼 남는 묘한 효과를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무튼 난 이래저래 속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