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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Jun 15. 2020

편견의 또 다른 말

편견의 또 다른 말은 후회다.


누구나 상황에 의해, 사람에 의해 재발견될 수 있다. 편견에 갇히면 딱 그만큼의 관계, 딱 그만큼의 가능성만 보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100%를 해내기란 어렵지만 편견만 없어도 80% 이상은 한다.


상상도 못 했던 상황들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편견'만큼 무서운 게 없다. 내가 '편견' 때문에 그르친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누군가의 '편견' 때문에 받았던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랩실에서 일을 하게 됐다. 맡았던 업무는 사업비 정산이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선배가 틱- 던져준 매뉴얼만 보고 캐치하지 못하는 일들이 분명 존재했다.


시스템에 입력된 기존 데이터를 보면서 부지런히 따라 했는데 자꾸만 실수가 생겼다. 내가 쓴 돈도 아니고, 내가 정산을 담당할 때 쓴 돈도 아니기 때문에 과거 내역을 듣지 못하면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실수가 잦아질수록 선배가 한숨을 쉬는 날이 늘었고 대화는 현저히 줄었다. 때론 대놓고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바보 같은 후배라는 선배의 편견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계속됐다. 평소 웃는 습관이 있는 내게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개 같다.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드는. 누가 너랑 친해지고 싶겠니?"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당시에는 이게 나쁜 소리인 줄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밤이 되자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멍청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 후배라는 선배의 편견은 한 학기 동안 이어졌다. 뭘 해도 한숨을 쉬었고, 잘 해가도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는 이들도 슬슬 날 걱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그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선배는 졸업을 하기 전, 연구비 카드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불편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선배와 원치 않는 메뉴를 먹었다. 선배는 자신이 직장에서 발행한 것이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겨울, 수많은 이들의 열기가 가득한 홍대입구 9번 출구 앞에서 날 끌어안고 말했다.


"사회에서 어떻게 만날 지 모르니, 서로 서운한 게 있다면 털어내자. 너도 졸업 무사히 하고!"


선배가 졸업한 뒤 나는 큰 실수 없이 업무를 했다. 랩실 생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마지막 최종 정산 시즌이 되었을 무렵,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입학하기 전 선배가 입력한 사업비 비목이 300여 건 이상 잘못되어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선배의 실수를 고치면서 짜증도 났지만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녀는 편견에 가득 차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본인이 충분히 인수인계를 한다는 명목으로 연구비를 받았지만, 멍청한 후배 때문에 고생한다는 생각을 하며 내내 짜증이 났을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편견이 그렇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의 시간을 후회하게 만든다.


딱 거기까지인 애와 일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딱 거기까지만 한다. 분명 나도 누군가에게 같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욕했겠지. 이제 분명히 알겠다. 우리는 딱 편견만큼만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수습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두 사람의 일은, 관계는 어떻게든 어그러져 있을 테니.




요 며칠 두통에 시달렸는데, 바람도 좋고 노을도 믿기지 않을 만큼 예뻐서 자칫 편견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 내 마음부터 다잡게 된다. 상대가 어떻든 난, 절대 후회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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