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빴다.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내달리기 바빴다. 시야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트랙 밖으로 눈 한 번 돌리지 못했다. 오늘은 컨디션 난조로 오랜만에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반대로 날씨는 아직 8월이 2주나 남았는데 하늘이 맑고 바람은 선선한 게 마치 가을이 온 것 같았다.
어떻게든 뭘 해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냥 집 밖을 나섰다. 날씨가 좋았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이 공허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의 뽀르뚜가가 생각났다. 보고 싶은 나의 뽀르뚜가.
집에서는 무관심 혹은 구박을 받던 제제가 으리으리한 차를 타고 다니던 뽀르뚜가를 만난 건 다섯 살 때였다. 제제는 뽀르뚜가의 차에 못된 짓을 하려다가 뽀르뚜가와 친구가 됐다. 뽀르뚜가는 친절했고 궁금한 것이 많은 제제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제제에게 뽀르뚜가는 친구이고, 아버지고, 형이고 또 어른이었다.
내가 나의 뽀르뚜가를 만난 건 스물두 살의 봄이었다. 정말 인기가 많은 그녀의 수업을 들었고 동화 속 모티브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수업은 첫 과제부터 거짓을 써내야 할 정도로 그녀의 수업은 내게 어려웠다. 주변의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괜히 못 마땅하기도 했다. 그만큼 난 과거에 사로잡혀 비뚫어져 있었다. 마치 다섯 살의 제제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녀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데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 써낸 과제는 모두 거짓이었고, 내 과거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말을 그녀에게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학점에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혹시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닐까 그도 아니면 무시를 당해버리는 건 아닐까?
노크를 하고 그녀에게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말하다가 울음을 터뜨렸고 꽤 긴 시간 울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가 떠올랐고 그때의 상처가 생생하게 스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건 이 모든 대화의 끝에 그녀가 보인 행동이었다. 날 미워하지 않았고 학점에 불이익을 주지도 않았고 얼른 말하고 나가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녀의 연구실을 찾아가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올 시간에 맞춰 그녀는 커피와 다과를 준비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너무 창피하고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는 내게 무대에 올라가 발가벗을 자신이 없으면 아예 글 쓰는 삶을 살지 말라고 단호하게 조언한 것도 그녀였고, 개떡같이 쓴 내 글을 정말 감쪽같이 고쳐주며 세상에서 가장 괜찮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도 그녀였다.
스물두 살의 난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녀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줬다. 목요일 저녁마다 함께 식사를 했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함께 봤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내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다. 힘든 고민 때문에 밤새 뒤척이다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면 다음 날 새벽 답장이 왔다. 내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고민해 보낸 조언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장 슬펐던 건 뽀르뚜가의 품을 떠나는 것이었다. 계속 연락할 수 있고, 밖에서 자주 볼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뽀르뚜가가 타 준 따듯한 커피를 마시지 못할 테니깐.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결코 공유할 수 없을 테니깐.
사회에 나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뽀르뚜가를 찾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뽀르뚜가의 품을 떠난 순간 알았다. 뽀르뚜가와 나의 관계과 전과 같이 않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엔 정말 참고 참다가 뽀르뚜가를 찾아갔다. 50m 앞에 뽀르뚜가가 보이자마자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스물두 살 처음 이야기를 나눈 날처럼 그녀의 눈엔 눈물 방울이 있었다. 그 힘든 곳에 간 게 마치 본인의 잘못인 듯 슬퍼했고 미안해했다. 그 뒤로 뽀르뚜가를 쉽게 찾아갈 수 없었다. 미안했기 때문이다.
미안함이란 감정이 참 그렇다. 내가 견딜 수 없을만큼 힘든 시절을 지나고 나니 이제서야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와 함께한 그 많은 순간 중에 나는 얼마나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는가 이런 생각들이 줄지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에 젖은 솜처럼 맘을 무겁게 했다. 간혹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뽀르뚜가가 보고 싶은 오후였다. 201-1호라는 독특한 숫자가 달린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서 그녀가 내주는 커피와 간식들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었다. 마치 뽀르뚜가의 차 뒤켠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제제처럼 말이다.
누군가 날 걱정할 것이 걱정되는, 어쩐지 이젠 듬직한 뒷모습을 보이고 싶은 어설픈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가장 슬픈 건 아마 그 어설픔 때문에 뽀르뚜가에게 달려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보고 싶은 뽀르뚜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고, 하리보를 오물거리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그냥 아무런 맥락 없이 나의 뽀르뚜가가 보고 싶은 날이다. 아무 생각 없는 어린 제제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다. 어설프게 유지하고 있는 어른 흉내를 그만 때려치우고 싶은 날이다. 이렇게 두서없는 글처럼 두서없이 뽀르뚜가를 만나고 싶은 날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마음에 걸려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리움이다. 안녕 나의 뽀르뚜가. 안녕 스물 두 살의 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