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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Jun 13. 2018

공부 좀 하라는 그들에게

“자칭” 페미니스트와 애국보수들에게


장면 1.    


여기서 배우라는 것은 결국,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해야 끝이 나는 이상한 공부다.

친구와 술을 먹다,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칭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한 번은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다는데, 그 말을 들은 자칭 페미니스트는 딱 한 마디로 더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고 했다. 바로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해야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까? 이들은 어떤 논리로 반박하기보다는, 그저 ‘공부하면 압니다.’식의 막무가내 대응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논리라면, 글을 모르시는 우리 할머니는 시대정신인 보편 인권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없다.    


친구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과의 특성상 페미니즘이나 포스트식민주의 등 오늘날 이슈인 사회 현상을 타과생들보다 훨씬 많이 접했다. 그는 권위 있는 여성학자로부터 한 학기 동안 페미니즘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얼마나 더 공부해야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설사 그의 주장이 틀렸다면(사실 틀린 주장은 없다. 오늘날 보편 가치와 맞지 않는 주장만 있을 뿐), 어떤 지점이 옳지 않은지 지적해주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고 ‘공부하고 오라’고만 하는 것은 그저 떼쓰는 걸로만 보일 뿐이다.




장면 2.    



한국일보 6월 8일 기사다. ‘그의 이론을 따라가기 힘들어졌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태극기 집회의 열성 참가자와의 인터뷰다. 그들 역시 자신의 생각과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공부 좀 하고 오라’는 핀잔을 준다.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빈약해 그 부분을 질문하면,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다. ‘공부하면 안다.’ 이러니 더 이상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들다. 젊은 세대들이 공부를 하면 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는 그들의 한탄은, 역으로 우리의 한탄이기도 하다. 서로 생각하는 ‘공부의 방향성’이 달라, 이해 없는 대립만이 세대 사이에 채워진다.    


이 기사 말미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김왕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진단이 있다. “사람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인식하게 되면, 권력집단의 이해관계나 개인의 이해관계가 중첩화되면서 정신 구조가 체화된다.”는 그의 설명은 집단의 프레임이 어떻게 견고해지는지를 말해준다. 이 프레임을 파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해하자는 그의 처방은 우리가 서로 노력해야할 일이다.  





고대 희랍에서 공부의 목적은 ‘진리 탐구’였다. 파르메니데스가 ‘학의 시원’을 고민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집필한 까닭이다. 보편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오늘날 역시 ‘진리 탐구’로써의 공부는 유효하나, 그것만이 공부의 목적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공부의 덕목은 바로 ‘이해’와 ‘공감’에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사회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자연을 이해하고 공감할지가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법이다. 오늘날 사상의 큰 흐름인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키워드가 ‘해체’인 이유다. 어떤 중심이 되는 것을 해체하고 타자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자칭 페미니스트들이나 애국보수들이 자신들의 것이 보편적인 진리인냥 대화 일체를 금하고 ‘공부 하고 오라’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 굉장히 구시대적인 발상인 셈이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사이비 광신도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들만의 신념에 빠져 자신들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타자의 것은 무시해버리는 그런 태도 말이다. 이해와 공감의 노력 없이 철저한 배척만이 있다. 이 현상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정보와 주장만 취합하게 되는 ‘확증 편향’을 야기해 더욱 더 대화 불가능한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간다.      


‘공부 좀 더 하고 와라.’ 이 말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상대방을 내리 까는 동시에 대화를 차단한다. 어떤 논리와 설득 없는 무시만이 가득하다. 여기엔 타인을 향한 존중과 배려가 없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독단과 오만의 대사다. 그들이 말하는 공부는 결국 자신들과 같은 의견으로 수렴하라는 강요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난 당신을 반대하지만, 당신이 억압당하면 기꺼이 같이 싸우겠다.”는 몽테뉴의 똘레랑스 정신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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